그동안 IT강국 코리아를 이끌어 온 동력의 절반 이상은 디지털방송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위성방송·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디지털케이블방송을 비롯해 최근의 IPTV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보통신 기술의 역사는 디지털방송 역사와 그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디지털방송 기술은 다른 나라의 장비·솔루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반쪽짜리 기술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DMB 구현에 들어가는 장비를 제외하면 디지털 방송에 필요한 장비와 솔루션 중 순수 국산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 방송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송출부 장비는 국산 장비를 쓰려 해도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이 거의 없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최근 수신제한장치(CAS) 업체들이 국내외 방송사에 의해 공급업체로 채택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그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국내외 유료방송 시장에서 국산 CAS가 채택되는 사례는 전무했다. 국산업체 중에서 기술력을 갖춘 업체가 거의 없기도 했지만 방송사도 신생 국산업체를 선택하는 대신 충분한 레퍼런스를 가진 외산업체를 선택하곤 했다. 방송의 안정성을 생각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방송사의 무조건적인 외산 업체 신뢰가 국산 업체가 성장하는 데 일정 부분 장애가 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 국내외 방송사에 기술력을 인정받아 가는 요즘, 국산 CAS 업체들은 다시 한번 중대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해외에서의 국산제품 간 출혈경쟁이다. 특히 베이징올림픽으로 새로운 방송플랫폼 도입 움직임이 활발한 중국에서 국내 업체 간의 저가 출혈경쟁은 그야말로 처절하다.
이젠 중국 방송사업자도 “한국 업체 둘만 데려다 놓으면 자동으로 가격이 내려간다”며 뼈 있는 농담을 할 정도다. 자칫하다간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국산 CAS 업체가 서로의 몸에 상처를 내며 공멸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냉혹한 사업 현장에서 어느 정도의 경쟁은 불가피하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생존은 보장받을 수 있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일단 계약서에 사인하고 보자는 막무가내식 경쟁은 지양해야 한다. 이제라도 공정가격을 통한 경쟁으로 건전한 시장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상엽 코어트러스트 차장 lesy@coretru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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