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칼럼]이러면서 "이공계 가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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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급적 많은 이공계 출신이 국회와 정부에 들어와 활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이명박) “국회의원과 대통령 비서관의 30%, 고위 공무원의 50%를 이공계에 할애하겠다.”(정동영)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대폭 늘리고 공무원의 이공계 비중도 40∼50%까지 끌어올리겠다.”(이회창) “30%를 이공계로 채우고 장차관, 대법관에게도 과학기술 보좌관을 두도록 하겠다.”(문국현) 지난 대선 당시 과학기술인 국회 비례대표 비율 현안에 대한 각 후보들의 공약이다. 비록 이명박 후보가 구체적 수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선 출마자들의 정책 집합이니 국민적 합의로 봐도 무방하다. 당시 과기인 출신 국회 비례대표는 홍창선·서상기 의원 단 두 명이었다.

 여야 각당의 18대 총선 비례대표 명단이 발표됐다.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철학의 빈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선 안정권 어디에도 과학기술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17대 국회에서 두 명뿐이던 과기계 비례대표도 사라지게 됐다. 비례대표가 무엇인가. 우리 사회 각계의 다양한 집단과 세력의 목소리를 의정에 골고루 반영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사회적 약자나 국가가 반드시 배려해야 할 분야의 전문가를 우선 충원하는 제도다. 가장 흔히 쓰이는 표현이 직능별 대표성을 가진 인사의 의회 진입이다. 국정의 조화와 균형발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런 비례대표에서 과기인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물론 이공계를 전공하거나 관련 기관 근무 경험자를 이 경우로 강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억지 춘향’ 격이다. 박근혜 의원을 공대를 졸업했다고 과기인으로 분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기계의 상징적 대표적 인물에게 반드시 금배지를 달아달라고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 과기계는 최소한 직능 대표성은 인정받을만큼 나라의 핵심역량으로 성장했다. 과기계 인사들은 최고의 전문가집단이면서도 특성상 정치성과는 담을 쌓고 산다. 국가 운영의 핵이지만 정치적으로 배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18대 국회는 무한경쟁의 세계질서 속에서 출범한다. 앞날 먹거리를 걱정하고 성장엔진도 돌려야 한다. 과학기술을 통한 국가 경쟁력 강화는 지상과제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면 미래는 없다. 의사·약사·교수와 노조지도자들까지 단골로 포함되면서 정작 비례대표 정신을 실현할 과기계는 아예 배제하는 것이 우리 정치권의 현수준이다. 전문가 영입하랬더니 오히려 권력실세들의 친소관계로 순번이 결정되는 판이다. 이 같은 노골적 권력의 사유화는 처음이다. 나라를 운영할 국정 철학이나 갖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무개념’도 정도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물론이고 야당까지도 유독 비타협적 퇴행적 행태를 보이는 분야가 과기계다. 노무현 정부의 평가할 만한 제도는 모조리 엎어졌다. 청와대 과기보좌관 자리가 날아갔다. 부총리로 격상됐던 과기부는 교육부에 통폐합됐다. 이제는 국민 대표기관조차 과기계는 안중에도 없다. 17대 국회에서는 과기계 인사가 비례대표 최상위 순번에 배정됐었다. 상황이 이렇지만 ‘이공계 문제’가 다시 불거진다면 “근본 대책 세운다” “과기인 우대 풍조 만든다”며 너도나도 떠들어댈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정치 권력의 인식 수준이 이 모양인데 당신 자식들에게 “이공계 가라”고 할 수 있겠나.

 이 택 논설실장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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