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백지에 그리는 정책

 요즘 기술사업화의 본산인 대덕특구에서는 대덕연구개발특구본부와 출연연구기관 너나 할 것 없이 백지에 ‘그림’ 그리기가 한창이다. 봄맞이 초·중고생 그림 그리기 대회가 아니라, 비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청와대는 청와대대로, 정부 각 부처는 부처대로 조직 개편에 이어 ‘청사진’ 그리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청사진’이라는 것은 본래가 설계도 따위를 복사하는 데 쓰이는 사진법을 일컫는다. 이 말이 확대돼 최근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계획이나 구상’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참여정부에 와서는 로드맵이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했다. 말 그대로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관별로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재의 배합이 천차만별이다. 단순히 나뭇가지만 그린 기관도 있고, 나아가 산만 그리고 있는 기관도 눈에 띈다. 마치 70년대 유행하던 유명화가 복제품인 ‘이발소 그림’도 보인다. 하얀 도화지와 연필만 주어진 탓이다.

 최근 한국과학재단과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이원화 체계로 그림을 그리다 난리가 났다. 지난 주말엔 서로 성질이 다른 이공계 및 인문사회계의 연구사업을 하나로 통합하고, 장학사업을 별도로 떼어내는 방침으로 가닥이 잡혀간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자연히 이공계와 인문사회계가 서로 떨떠름한 표정이다. 이질적인 조직과 업무, 평가기준마저 서로 다른데 한 도화지 속에 모두 잡아넣기가 쉽지 않아 생긴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놓은 대선 공약 중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라는 것이 있다. 국제와 과학, 비즈니스, 벨트 각각 떼어놓으면 단어마다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과학과 비즈니스가 어느 구석에서 상통하는지 참 어려운 단어다. ‘과학기술+비즈니즈’라면 또 모를 일이지만. 출발점부터 모순인 셈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대덕연구개발특구본부와 대전시, 충남도, 충북도 등은 청사진을 그리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또 짜고 있다.

 이해 잘 안 되는 그림은 또 있다. 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핵심은 기초과학 육성이다. 그런데 왜 하필 수조원이 투입되는 ‘가속기’가 들어와야 하는가의 문제다. 기초과학 육성이 ‘가속기’ 하나만으로 된다고 보고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소속도 재미있다. 벨트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고, 벨트 그림을 그리고 있는 대덕연구개발특구본부는 지식경제부 소속이다. 여기에 5+2 광역 경제권이 맞물려 있고, 충남·충북·대전은 각각 다른 복심을 갖고 구상 중이다. 손발이 맞을 리 없지만 다들 뭔가 열심히들 그리고는 있다. 출연연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사업화의 난맥상을 풀어낼 묘수 찾기쯤 돼 보인다.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대체에너지가 주목받자 ‘속’은 놔둔 채 풍력과 태양열 에너지 R&D라는 그림으로 덧칠하는 기관도 생겨나고 있다. 정물화나 풍경화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또 수채화나 유화 전공이 따로 있는 법이다.

 색을 입히기 전에 그림을 구상하고, 스케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색칠만 했다고 다 ‘그림’이 아니다. 지난 5년간 4700만 국민은 부문별로 참 많은 그림을 그려봤고, 그림 보는 눈도 생겼다. 이제 더 이상 습작은 없어져야 한다.

박희범 전국취재팀장 hb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