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자존심 상해 죽겠습니다. 도대체 우리를 뭘로 보는 겁니까” 공무원인 한 후배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는 한 중앙부처의 팀장이다. 이 부처는 정부 조직개편으로 곧 사라질 판이다. 처음 임용돼 청춘을 같이한 조직이 없어지니 속이 상할 만도 할 것이다. 조금 더 얘기를 들어보니 이 이유만은 아니었다. 공직 자체에 대한 회의였다. “우리가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근거 없이 욕을 하면 안 되지요. 공무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몹쓸 인간’으로 취급받는 게 너무나 화가 납니다.”
차근차근 들어보니 이해가 간다. 참여정부 들어 휴일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는데 고작 되돌아온 한마디는 ‘영혼도 없는’ 인간이다. 그것도 공직을 떠날 인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새 정부의 시각도 별반 차이는 없다. ‘전봇대 하나 못 뽑는 공무원’으로 놀리는가 싶더니 이제는 공무원도 수입할 태세다. 묵묵히 일만 해온 공무원들로선 참담할 따름이다.
사실 최근 몇 년간 공직사회도 많이 변했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기득권 세력으로 몰렸지만 업무 프로세스도 많이 선진화했다. 비리도 거의 사라졌다. 감사원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일부 지방 공무원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비리를 저지를 수 없는 구조로 바뀌었다.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도 물론 있다. 소신이 사라졌다. 몇 년 전만 해도 국장이나 과장급은 장·차관이 시키는 일일지라도 소신과 맞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었다. 거듭되는 지시에도 “검토해보니 안 되겠습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그래도 언젠가 되돌아왔다. 요즘은 다르다. 한번 ‘물’을 먹으면 되돌아오기 힘들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소신을 펴는 공무원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른다. 공직 자체의 특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공무원을 지휘하는 정권이 만든 것이지 공무원 스스로 이렇게 하자고 해서 된 게 아니다.
새 정부가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까 걱정스럽다. 전봇대 소동이 그렇다. 속사정을 들어보니 비용 분담 문제가 있었다. 한전과 지자체, 입주업체 간 분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처리할 수 없었다. 어떻게 분담하는지에 따라 다른 공단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항이니 좀처럼 합의하지 못했다. 정책 당국으로선 대불공단에는 전선 지중화율을 높이던 중이었고 이보다 더 시급한 일도 많았다. 단지 이명박 당선인과 우선 순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당선인의 생각처럼 일단 일부터 해결해놓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르나 행정에는 절차도 중요하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도로 훈련받은 공무원만이 행정 행위를 하도록 규정됐다. 당장 전봇대를 치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행정절차를 합리적으로 간소화해 납세자를 편하게 해줄 방법을 찾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공무원에게 자율성을 부여할 환경도 만들어야 한다. 아마도 당선인이 전봇대 얘기를 꺼낸 것은 이런 이유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산업자원부와 공단, 한전 관계자가 그 난리를 치면서, 그것도 감전 위험이 높은 눈비 속에 전봇대를 치우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참여정부 때에 그랬듯이 이명박 정부 5년간 공직사회에 변화가 많을 것이다. 탁상 행정은 사라지고 현장을 지키는 공무원은 늘어날 것이다. 바람직한 방향이며, 기대도 크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공무원의 자존심만을 짓밟아선 안된다. 사회가 투명해지면서 부패에 찌든 공무원은 이미 다 떠났고, 그 자리를 민주화 이후 세대가 채웠다. 합리적인 사고와 일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젊은 관료들이다. 이들이 소신 있는 행정을 펼치게 하려면 어느새 꺾인 ‘자존심’과 ‘패기’부터 살려야 한다. “공무원 때려치울까 봐요”라는 말을 이들의 입에서 더는 듣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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