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2)잉태기-우정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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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 직전일 것으로 추정되는 교환국의 모습.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개화기 전기통신 연표

 1887년 3월 초순 저녁. 어스름한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눈부신 빛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다. 주위에 모여든 구경꾼들은 “와아!” 하고 모두 놀랐고 두려운 나머지 숨어서 이 신기한 장면을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바로 근대문명의 상징인 전등이 이 땅에 처음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자 구중궁궐의 신비가 전기의 힘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한 지 8년 만에 서울에 전등이 켜졌으니 당시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전기, 은둔의 땅을 밝히다=에디슨전등회사의 전기기사 윌리엄 맥케이는 경복궁 향원정에 3㎾ 규모의 증기발전기를 설치한 다음 정부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건청궁 처마 밑에 설치된 백열등 2기의 점등식을 가졌다.

 이 문명의 불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 땅에 들어왔다. 세계 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이 가해지면서 1882년 5월 조선은 미국과 한미통상협정을 체결했다. 같은해 8월 민영익·홍영식 등이 사절단이 돼 미국에 파견됐으며 새로운 문명의 세계를 접한 이들은 돌아와 고종에게 발전소 건설을 건의했다. 마침내 에디슨 전등회사와 계약하고 1884년 9월에는 미국에서도 발명된 지 얼마 안 되는 전등을 궁궐에 설치하기 위해 발전시설과 전등 일체를 발주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 전기 도입은 중지됐다. 1885년 들어 정국이 차차 안정됨에 따라 조선 정부는 다시 왕궁의 전등 시설계획을 추진했다. 1886년 말 전기설비들이 인천항에 도착했고 에디슨전등회사가 전기기사 윌리엄 맥케이를 파견하면서 본격적인 설치공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3월 초 건청궁에 전등을 가설해 점등했다.

 하지만 전등의 수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던 것만은 아니었다. 전기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과 억설이 인구에 회자되니 대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상소문이 빗발치듯 올라왔다. 고종은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전등을 밝혔다. 1894년에 창덕궁에 제2 전등소가 세워졌다. 이 전등소의 발전 용량은 경복궁의 것보다 세 배나 큰 것으로 약 2000개의 전등을 밝힐 수 있는 규모였다.

 이후 1898년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정부로부터 서울시내 전기사업 경영권을 얻어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서대문과 홍릉 간 궤도와 전선로를 개설하면서 전기사업이 본격화했다. 한성전기회사는 이후 1900년 4월 10일에 종로에 거리조명용 전기를 송전하고 1901년 8월 17일 진고개 일본인 상가 주택가에 600등의 첫 영업용 전등이 밝혀지면서 본격적인 전기사업으로 발전의 길을 걸었다.

 ◇전신, 세계로 통하는 길을 열다=전기가 도입되기 2년 앞서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또 하나의 신문명이 바로 전기통신이었다. 조선은 1885년 9월 서울부터 인천까지 모스부호를 이용한 전신을 가설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한성전보총국을 세웠다. 경인 간 전선선로에 이어 1885년 10월에는 서울∼의주 간 서로(西路)전신선로가 개통됐다. 서로의 개통으로 비로소 우리나라는 청나라를 거쳐 유럽까지 전기통신이 가능하게 됐다.

 1888년 개통돼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 전신선은 우리 기술로 이루어진 쾌거였다. 1887년부터 조선 정부는 독자적인 전선 가설을 계획했다. 그래서 인천에 있던 독일 회사 세창양행과 교섭해 각종 전신기구와 기계를 구입하였다. 또 당시 정부의 영어교사였던 영국인 할리팍스로 하여금 전선 노선을 측량하게 하였다.

 또 조선 정부는 전신업무를 전담할 기구로 조선전보총국을 세웠고 오늘날 정보통신부 장관에 해당하는 초대 총판도 임명했다. 전기통신법인 ‘전보장정’도 만들었다. 이 남로전선 건설로 조선은 해외 전신과도 연결됐다. 남로전선의 개설이 가까워지자 정부는 이 전선을 다시 연장해 서울에서 함경도에 이르는 전선을 가설하고 이를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전선에 연결시킬 것을 비밀리에 계획했다.

 마침내 남로전선이 개설된 3년 후인 1891년에 서울과 원산을 잇는 북로전선이 개설됐다. 이 북로전선이야말로 함경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돼 명실상부한 동양 3국의 주요 간선으로 발전시키려 한 꿈이 담겨져 있는 전신선로였다.

 ◇전화, 세상과 소통하다=전화는 전신과 더불어 근대적인 통신시설을 대표하는 시설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김윤식이 1882년 2월에 천진을 방문해 전화기를 처음 보고 최초로 통화를 해봤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도입된 것은 1893년 청나라를 통해 궁중용 전화기가 인천을 통해 들어온 것이 그 시초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으로 전화 가설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마침내 1896년에 궁내부(덕수궁)에 전화가 가설돼 중앙의 각 아문은 물론이고 인천까지 개통됐다. 그러나 이때 설치된 전화는 황실 소속의 궁중 내부에 설치된 것인만큼 일반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는 궁중 전용이었다. 궁내부에 설치된 전화는 1년 정도의 준비과정을 거쳐 설치된 것이었다. 궁내부는 궁중과 정부 각부 및 인천 감리서 사이의 전화업무를 관장하는 기구였다. 이때 설치된 전화는 전화기를 돌려 교환원에게 연결되면 교환원이 다른 상대자에게 연결시켜주는 자석식 전화기였다. 경운궁 안의 궁내부에 교환대를 설치하고 교환수를 배치했다.

 1899년에는 궁내부에 전화과를 두어 전화 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일반이 널리 이용할 수 있는 공중전화의 보급을 연구하게 했다. 드디어 1902년에는 통신원이 경영하는 서울∼인천 간의 공중전화가 개설됐고 전화 업무를 관리하기 위한 각종 규칙도 제정됐다. 6월에는 한성전화소를 설립해 시내 전화업무를 개시했다. 서울∼인천 간 전화 개통은 교환업무에 의한 최초의 공중전화의 등장이자 본격적인 전화사업 개시를 알린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1903년 말에 이르면 전화시설은 정부의 주도하에 상당한 진전을 보이며 발전했으나 이후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개화기 전기통신을 이끈 인물

 우리나라 전기통신산업 싹이 튼 것은 개화기였다. 초창기 전기통신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은 모두 외국인이라는 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의 전기 도입은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이듬해 9월 유길준 등 10명의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된 것이 계기가 된다. 보빙사는 미국 시찰 도중 신의 조화라고 불리던 에디슨전기회사의 대단위 전기 시설을 둘러본 다음 큰 감명을 받았다.

 유길준은 뉴욕 헤럴드 신문사와의 인터뷰(1883.10.15)에서 “우리는 일본에서 전기용품을 관람한 일이 있다. 그러나 전기불이 어떻게 켜지는지 몰랐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비로소 전기가 어떻게 켜지는지 알게 됐다. 또 지금까지 사용하던 석유등보다 값싸고 편리하며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조선에도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1884년 9월 4일 조선 정부는 당시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를 통해 에디슨사의 전기 시설을 왕궁에 설치하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에 에디슨전기회사는 전기기사인 윌리엄 매케이를 조선 전기관리책임자로 임명하고 1886년 9월18일 미국 국무부에 여권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윌리엄 매케이는 1887년 3월 점등에 성공한 후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같은 달 건청궁의 전등소에서 매케이는 그의 권총을 조작하던 한국인 기수(매케이의 호위와 시설의 경비담당)의 우발적인 오발로 총격을 입고 다음날 아침에 사망했다.

 한양의 전등과 전차 그리고 발전소와 수도사업 등 온갖 근대적 시설에 개입하지 않은 바 없는 콜브란과 보스트위크도 주요한 인물이다. 1896년 인천에 상륙한 두 미국인은 처음에는 인천에서 미국인 모스와 합작해 경인철도 부설운동을 하다가 1898년 서울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왕실에서 거액을 출자받아 1898년 1월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최초로 의주로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첫 전기철도를 그해 말 부설하고 다음해 4월 초파일(양력 5월 17일)에 전차개통식을 열었다.

◆개화기 전기통신 연표

1885년 9월 한성전보총국 설립

1887년 3월 국내 최초 전등 점등

1894년 5월 창덕궁 제2 전등소 설치

1896년 궁내부(덕수궁) 전화 설치

1898년 1월 한성전기회사 설립

1899년 4월 전차 개통

1902년 3월 한성∼제물포 간 전화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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