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중수 KT 사장이 자주 화제에 올리는 두가지 얘기꺼리가 있다. 하나는 월드컵 괴담.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국 2위의 유선 사업자인 월드컴이 파산했고 2006년 월드컵 때는 세계 굴지의 통신회사인 AT&T마저 버라이존에 인수·합병됐으니 2010년에는 또 어떤 사업자가 문닫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KT 민영화에 대한 부분. 민영화와 경쟁이 KT를 도태시킬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결과적으로 2002년 민영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KT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더욱 힘든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두가지 모두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규모가 크든 작든 치열한 통신시장에서는 언제든지 한방에 쓰러질 수 있는 리스크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보호막은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쟁은 시장에, 시대에, 흐름에 적응한다는 의미다. 유선과 무선간 무한경쟁, 통신과 방송의 융합, 통신·방송·인터넷·단말기업체가 벌이는 미디어 전쟁, 규제 완화와 주파수 경매제, 국경없는 글로벌 시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격변기에 통신업체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하나, 재빨리 적응하고, 한걸음 앞서 나가는 것 밖에는 없다.
◇무한 경쟁에 돌입한 통신시장=통신시장은 전통적인 울타리 산업이다. 규제정책과 주파수할당이라는 이슈 때문에 진입할때 막대한 ‘입장료’를 내야한다. 하지만 일단 들어오면 먹을 떡이 충분한 ‘달콤한 시장’이 기다린다. 유선업체는 유선시장 내에서, 무선업체는 무선시장 내에서만 제한된 경쟁을 통해 나눠먹기만 하면 그만이다.
최근 몇년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유무선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물론 통신과 방송 등 타 산업과의 컨버전스 움직임이 거세졌다. 영국의 BT는 일찌감치 BT퓨전이라는 결합상품으로 시장에 빨리 적응해나갔다. 프랑스 오렌지는 최근 무선 유니크(가정에서 라이브 박스로 전화걸거나 3만개 핫스팟존에서 전화걸 때 유선 및 망내통화는 무제한 무료인 상품)와 ADSL TV, 인터넷을 통합한 패키지 상품인 ‘넷엣유니크(net et unik)’를 내놨다. 초기 3개월간 29.9유로(3만5000원선)로 꽤나 파격적이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네프의 트윈을 비롯해 유럽내 무제한 무료 인터넷전화와 IPTV·초고속인터넷을 결합한 상품이 20∼40유로선에서 쏟아지고 있다.
◇점점 낮아지는 통신 진입장벽=지난 7월 미국 인터넷업체 구글이 46억달러에 무선 주파수 경매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것은 일대 사건과도 같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라면 구글은 통신업체들과 제휴해 서비스를 연계하거나 콘텐츠를 팔아 수익을 챙기는 정도만 생각했어야 한다. 그러나 구글은 직접 주파수 경매에 참석해 직접적인 통신 네트워크 서비스를 추진할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구글 뿐만아니다. 애플과 같은 컴퓨터 기기업체, 노키아와 같은 휴대폰 단말기 업체들의 움직임도 심상치않다. 애플은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단말기 디자인, 애플리케이션 선정, 단말기 가격 책정 등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통상 서비스 업체인 AT&T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게 관례지만 이 같은 구도를 깨뜨렸다. 아이폰 때문에 AT&T에 가입하는 이용자가 훨씬 더 많다는 자신감에 기인했다.
이미 소비자 시장에서 인지도 획득에 성공한 이 같은 대형 스타기업의 통신시장 진입은 기존 업체에게 상당한 위협요인으로 작용한다. 망 사업자를 중심으로 단말기·콘텐츠 업체들이 상하관계로 연결돼온 기존 구도를 깨뜨린 것은 통신시장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700㎒ 무선 주파수 경매정책은 새로운 시장 진입자에 유리한 개방을 지향한다. 프랑스는 기존 GSM 사업자들이 보유한 900㎒ 주파수를 전면 재편해 신규 사업자 등에게 공정분배하는 정책을 도입키로 해 화제를 모았다. 주파수 기득권이 점점 사라지면서 새로운 플레이어의 출현이 더욱 용이해지게 된 것이다.
◇느리기만 한 우리나라 통신행보=삼성네트웍스는 최근 무선LAN이 있는 실내에서는 와이파이폰으로, 외부에서는 이동전화로 사용할 수 있는 유무선통합(FMC) 서비스를 선보였다. 국내 첫 FMC서비스라는 점, 단말기업체 및 이통사업자와 연계한 대표적인 융합 서비스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미 해외와 비교하면 늦어도 한참 늦었다. 해외 사업자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컨버전스와 글로벌 리더십을 위해 몇년전부터 발빠르게 움직인 것과 대조적이다. 물론 KT가 지난 2004년 원폰이라는 상품을 출시했지만 규제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KT와 SK텔레콤 등 내 기간통신사업자들은 올해도 무선 재판매, 위피, 리비전A 식별번호 문제로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며 통신위 제소도 끊이질 않았다. 이 같은 움직임은 정통부의 규제정책이 조금이라도 자사에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하기위한 고육지책이지만 미래 먹거리를 만드는 청사진과 거리가 멀다.
정통부는 지난 3월 15일 중장기 통신규제정책 로드맵을 발표했다. 진입규제 완화를 통해 새로운 사업자의 출현을 늘리고, 그동안 유무선간 꽉막혀있던 울타리를 걷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업계 전문가들은 “아직 통신사업자들이 새로운 규제에 적응할 준비가 덜 됐다”고 말한다. 더욱 큰 문제는 정통부 조차도 새로운 규제를 얘기하면서 기존 규제틀을 이중 적용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변화에 대한 적응이 늦을수록 글로벌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냉정한 통신시장 동정은 절대 없다
한솔PCS·신세기통신·두루넷·월드컴·AMP’D의 공통점은 뭘까.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결국은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합병되거나 파산한 업체들이다.
한솔PCS는 KTF에, 신세기통신은 SK텔레콤에, 두루넷은 하나로텔레콤에 각각 인수됐으며 미국 유수의 통신기업인 월드컴은 회계부정으로 파산을 맞았다. 미국 MVNO 사업자였던 AMP’D는 적자를 면치못하고 사업을 접었다.
최근에는 어린이들에게 특화된 MVNO 서비스를 제공해온 디즈니모바일이 끝내 문을 닫았다. 1년전 또다른 MVNO 서비스인 ‘모바일ESPN’을 중단한데 이어 디즈니는 이제 MVNO 시장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된 것이다. 스티브 와즈워스 인터넷사업부 사장은 “미국 통신시장에서 정말 살아남기 힘들다”는 감회를 남겼다. 미국 인터넷전화 업체인 선로켓도 7월에 사업을 중단했으며 잘나가던 O2UK는 2년간 야심차게 추진해온 i모드 사업을 최근 중단하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시장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됐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반면 미국의 ‘ooma’는 지난 몇년간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를 개발중인지 공개하지 않은채 무려 2700만달러의 펀드를 유치해 통신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최근 베일을 벗은 ooma의 비밀병기는 여러 업체들이 실패해서 울고나갔던 바로 인터넷전화였다. ooma의 시도가 성공을 거둘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시장에서의 적응은 아이템의 문제보다는 타이밍과 접근전략이 관건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난해말 초고속 가입자를 하나로텔레콤에 이관한 온세텔레콤이 최근에는 아예 하나로텔레콤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도 시장의 변화무쌍한 속성을 보여준다.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는 통신업체들의 몸부림은 더욱 치열해질 수 밖에 없다.
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