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관용이 이탈리아 베니스상인의 상징이라면 우리나라의 개성상인은 신용과 정직이다. 그들은 폐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폐 주는 것을 견디지 못할 만큼 앞뒤가 분명하다. 무차입 경영, 신뢰 경영, 한우물 경영이 덕목이다. ‘송방(松房)’ 또는 ‘송상(松商)’이라 불렸던 그들은 벼슬 대신 상업에 전념, 전국 시장의 경제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성정(性情)은 조선왕조가 500여년 존속하는 동안 중앙권력의 견제 속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를 일으켜 세운 자주·자립·자조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예로부터 개성상인은 ‘짠돌이 경영’으로 유명하다. 허튼 곳에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남의 돈을 빌려 장사도 하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상술로 절약과 절제, 근면과 성실, 신용으로 오늘날까지 상업의 원칙이 될 만한 상도철학을 남겼다. 하지만 역사의 혼란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점점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져 갔다.
1960년대에 이르러 개성상인의 후예들은 무형의 종자돈으로 다시 옛 영화를 구현했다. 고인이 된 신도리코 가헌 우상기 회장이 그랬다. 그는 개성상인의 후예로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개성상인의 정신을 현대의 기업가 정신으로 부활시킨 주인공이다. 그는 한눈을 팔지 않고 신용을 최고의 상도로 삼았다. 짠돌이 경영으로 유명했지만 적어도 공익사업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돈의 가치보다 인간의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는 격언을 즐겨 쓴 가헌은 임원들을 강하게 훈련시키고 자식처럼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알았다. 협력업체에도 잘못된 것은 자식처럼 꾸짖고 잘한 것은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신도리코의 현금보유액은 항상 2500억원 이상을 유지한다. 지금까지 협력업체들은 물품대금으로 어음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이는 거래처와 고객과의 관계에서 신뢰라는 그의 투명경영 ‘개성철학’이다. 시대가 바뀐 우석형 사장의 2세 경영에서도 개성철학은 그대로 묻어난다. 지금도 추석 등 명절이 오기 전에 모든 대금은 현금으로 결제한다. 신도리코의 이런 ‘발전적 역할분담’은 아직도 존경받는 개성철학으로 회자되고 있다. 선비의 정신으로 상인의 재능을 꽃피운 가헌의 철학이 요즘의 너와 나라는 이분법적인 기업경영에 반드시 필요한 사혼상재(士魂商才)가 아닐까.
김동석차장·퍼스널팀@전자신문, d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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