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아버지를 보내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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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증은 꽤 오래갔다. 문상왔던 친구들의 경험과는 달랐다. 부모님을 떠나보내게 되면 슬픔과 죄책감, 그리움을 단계적으로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자책에 시달렸다. 우리 세대의 여느 부자지간처럼 아버지와 소원하게 지낸 탓에 그리움도 그다지 절절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임종 시의 모습이 생생해 고통스러웠다. 응급실에 실려가서 이튿날 숨을 거두실 때까지 내가 좀더 나섰더라면 고통을 줄여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임종 직전 얼음장처럼 식은 손발을 좀더 만져드렸어야 하지 않았나, 모든 게 후회막급이었다.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기자 시절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전화조차 거의 못 드렸던 것과 이유없이 반항하고 대화조차 피했던 학창 시절 기억까지 괴로웠다. 이런저런 회한들이 겹칠 때는 무척 힘들었다.

 심통이 날 때도 있었다. 생전에 처자식을 왜 그리 고생시킨 것인지 공연히 화가 났다. 아버지의 거듭된 실패로 가족들이 모진 세월을 보냈던 거며, 사춘기 때 사상범에 대한 동향점검차 낯선 형사들이 찾아올 때마다 느꼈던 깊은 원망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아버지와 사별한 것이 재작년 12월인데, 나는 한 해가 지나도록 면벽한 수도자처럼 자책의 화두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작년 추모 1주기 날, 아버지의 빈 방에서 유품을 정리할 일이 있었다. 지나치리만큼 과묵했던 아버지는 한 집에 살아도 섬 같은 존재였다. 평생을 어떻게 사셨는지 자식들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장롱 속의 각종 계약서, 이력서, 빛바랜 원고 뭉치들과 모퉁이가 너덜거리는 낡은 사진첩을 하나 둘 정리하면서 그간 편린으로만 알고 있던 아버지의 일생이 짝맞춰졌다.

 일제치하 함경남도 부령의 군수집안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아버지는 15세 어린 나이에 홀로 경성과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상점보조를 하며 독학으로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까지 입학했다가 강제징병돼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재일교포인 어머니와 결혼한 후 부산으로 돌아와 고교 국어교사로 일하며 글을 썼는데 이것이 좌익활동으로 몰려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교직을 박탈당한 뒤에는 한 차례 옥고도 치렀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언론인으로서, 정부관료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출범 후 정치정화법이 소급적용되면서 모든 공직활동이 금지되는 불운까지 닥쳤다. 1970년대 건설 호황에 힘입어 건설업으로 돈을 모을 즈음에는 동업자들의 배신으로 두 차례나 파산해 오랜 세월 빚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는 칠순 때 한 경제신문의 창간에 관여하는 등 재기를 노렸고, 여든을 넘겨서는 일감을 찾아 자식들에게 작은 집 한 채라도 물려주려고 애썼지만 모두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나는 아버지의 일생을 복기하면서 또 다른 아버지를 보는 듯했다. 나와의 관계에서 바라본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생 그 자체를 볼 수 있었다. 가는 길목마다 막혀버리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 어찌 그토록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일까. 내가 대면한 아버지는 시대적 불운과 개인의 불행 속에서도 포기 없이 끝내 생을 완주해낸 한 늙은 마라토너의 모습이었다.

 서랍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낡은 지갑 속에는 경로우대증과 현금 4만5000원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유산의 전부였다. 오랜 세월 자식들이 생활비를 대드렸으니 그 이상의 유산이 있을 턱이 없었을 것이다. 사후에 대한언론인회의 위로금과 건강보험의 장제비용 몇십 만원이 보태졌을 뿐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이북사람 특유의 강인한 체질과 임종 직전 한 맺혔던 옛 동업자들의 배신을 용서하는 마지막 미덕을 자식들에게 남겼다.

 내가 느꼈던 자책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고 그것은 실로 부질없었다. 아버지는 한 자연인으로서 특별한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아버지를 죄책감 속에서 놓아드렸다. 자식들의 게으름으로 가물에 콩 나듯 볼 수 있던 손주들에게 “아이구야, 많이 컸구나!” 하며 환히 웃던 얼굴과 이따금 술기운에 내게 전화를 걸어 “막내냐?”라고 하던 컬컬한 목소리만 남겨둔 채 편히 보내드릴 수 있었다.

◆주태산 맥스무비 사장 joots@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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