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의 소설 ‘모범 경작생’은 양면성을 띤 지식인의 모습을 그렸다. 주인공 길서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통학교를 나왔다. 군(郡)의 농사 강습회 요원에 자신의 땅까지 가진 선망의 대상이다. 그의 논엔 ‘모범 경작생’이란 푯말이 꽂혀 있다. 하지만 일제 수탈에 앞장서고 일본 시찰단에 뽑히기 위해 관료들 계략에 동조하는 등 일제의 편에선 모범 경작생이지만 마을사람들에겐 이기적 배신자로 인식된다.
길서는 병충해와 흉작으로 빚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곧 호경기가 오니 열심히 일하자고 기운을 북돋운다. 반면에 본모습은 일본 시찰단 선발 욕심에 면장과 지주의 호세 인상에 동조하고, 뽕나무 묘목값 인상을 방관하는 기회주의자다. 결국 ‘모범 경작생’ 푯말은 쪼개져 농로에 나뒹굴고, 길서는 뒷문으로 줄행랑을 친다.
70여년 전 소설이다. 하지만 이 줄거리에 자꾸 주변인을 대입해 보게 되는 건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인사가 곧 만사라지만 인사결과에 낙하산, 회전문, 하수인 등의 수식어가 달리면 인사권자나 당사자나 주변관계자 모두 개운할 리 없다.
적잖은 수의 국무총리, 부총리, 부처장관, 검찰총장 등의 내정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 부정축재, 병역기피, 탈세, 비리연루와 같은 허물로 망신만 당한 채 고배를 마신다. 최근엔 교육부장관이 논문 표절·논문 중복게재 의혹으로 물러났고, 건강보험관리공단이사장은 건강보험료·국민연금 탈루 의혹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수장의 자질을 입증하기 위한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다. 언론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을 말끔히 해소해야만 임명자도 영이 선다. 하지만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아니면 말고 식이나 딴죽 걸기 식의 의혹제기는 절대 안 된다. 검증작업을 통해 의혹이 해소된 이후라면 힘을 실어주는 일도 잊어선 안 된다.
며칠 전 유영민 제4대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장이 취임했다. 5월 중순 최초 공모에서 적임자를 찾지 못해 재공모 과정까지 치르며 3개월여 만에 어렵게 선출한 진흥원장이다. 그가 순수 SW업계가 아닌 IT서비스 업체 출신이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는 CIO 1세대다. 27년 경력의 전산통이다. 근거도 없고 의혹 수준도 아닌 감정적 편견은 과감히 버리자. SW진흥을 그에게 맡겼다면 이젠 참된 모습의 ‘모범 경작생’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자.
컴퓨터산업부·최정훈차장@전자신문, jhchoi@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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