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기업]서남표 KAIST 신임 총장

Photo Image
KAIST가 세계적인 이공계 명문으로의 도약을 준비중이다. 신임 서남표 총장이 지난 13일 기자 간담회 도중 양복 윗도리를 벗어젖히고 ‘양극단 이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54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 유학 길에 올랐던 서울의 한 고등학생이 반세기 만에 국내 이공계 대학 총장으로 돌아왔다. 미국서 일군 성공신화를 한국에 전수하기 위해서다.

 미국 MIT 석좌교수로 활동하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수장을 맡은 서남표 총장(70)은 지난 주 전자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딱 4년 만”이라는 말을 꺼냈다. KAIST가 세계 초일류 대학으로 나아갈 기틀만 다져지면 언제든 훌훌 털어버릴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이다.

 미과학재단(NSF) 부총재 역임 시절 4년 개혁을 예로 들며 “그 정도 기간이면 KAIST 혁신의 기틀은 마련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KAIST의 비전과 이를 실천할 계획을 이미 세워 놓았다는 것이 서 총장의 귀띔. KAIST의 상황과 환경에 맞춘 ‘한국형 MIT 학과장 책임제 모델’을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이 모델에는 서 총장이 그동안 추구해온 ‘끊임없는 혁신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KAIST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혁신’이 기본이고, 그 ‘혁신’을 ‘대화와 토론, 설득 과정’에서 합리적이고 자율적으로, 모두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변해야 산다’=변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 서 총장의 지론. 그래서 주위에서는 서 총장의 인생역정을 ‘끊임없는 혁신 그 자체’라고 평가한다.

 서 총장은 KAIST 총장으로 오자마자 교수진이 한 자리에 안주하기보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라는 주문부터 했다.

 “KAIST 교수 410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220명이 50세 이상입니다. 15년 전만 해도 역동적이던 KAIST 교수진은 그동안 고참만 늘었습니다. 이래서는 새 아이디어가 안 나옵니다. 세계 1등 어렵습니다.”

 KAIST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합심해 변혁을 꾀해야 한다고 서 총장은 주장했다.

 “서로 의논부터 합시다. 새 학문할 교수 밀어줍시다. 내 나이가 70인데 50세 교수는 젊은이 아닙니까. 위치 보장은 할 수 없지만 교수들이 새 분야로 들어가고 아이디어 내면 학교도, 나도 적극 도울 것입니다.”

 서 총장은 당장 급한 것이 ‘젊은 피’를 확보하고 대학의 방향 전환을 모색할 ‘예산마련’이라고 말했다. KAIST는 ‘돈’이 없고, ‘돈줄’은 정부가 쥐고 있기에 직접 ‘구걸’이라도 해서 예산을 끌어와야겠으니, 교수 모두가 나서서 도와 달라는 주문이다.

 KAIST 경영에 관한 밑그림도 내놨다. 미 MIT 시스템처럼 학과장에 인사권 등 전권을 부여할 테니 발로 뛰어 학과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서 총장은 그러면서도 한국상황과 KAIST가 처한 환경이 다른 만큼 MIT모델의 기계적인 적용을 스스로 경계했다.

 ◇현장서 깨우친 창조형 인간=서 총장은 한 때 하드버대 첫 한국학과 교수이던 아버지의 그늘에서 사립고교와 MIT학부 1년을 보냈다. 그러나 대학 2학년 초 ‘어머니가 아파 더는 학비를 보태줄 수 없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부터 도서관 사서보조에 기숙사 야간 전화 교환수, 청소부라는 세 가지 아르바이트를 한꺼번에 하며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2, 3학년 때는 실험실 조교도 했습니다. 고장난 옛날 기계를 엄청나게 고쳤습니다. 대학생이 배울 수 없는 것을 습득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은 일부 기억이 안 나도, 실험실서 배운 것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서 총장은 현장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장서 부딪치는 경험이야말로 산교육이자 창조형 인간으로 가는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3학년 여름방학 때는 산업전선에 뛰어들어 아이스크림 플라스틱 컵 자동화 기계로 첫 특허를 냈다. 이 기계는 모두 26개국에 보급됐지만 당시 받은 인센티브는 고작 150달러였다.

 ◇아이디어가 성공 지름길=“카네기멜론대서 박사학위를 마치니, 오라는 데가 많았습니다. 25세 때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 조교수로 가서 교과과정을 만드는 등 대학을 세팅했고, 다시 MIT로 옮겨서는 미과학재단(NSF)에 산·학 컨소시엄 프로젝트를 제안, 당시로는 파격적인 액수인 50만달러(현재가치로 400만달러 수준)를 지원받았습니다”

 70년대 처음 무역적자를 경험한 미국 정부가 생산성 문제를 고민할 때 서 총장은 GM이나 뒤퐁 등 14개 회사를 끌어들이는 시의 적절한 아이디어로 NSF의 지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로 인해 서 총장은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최적 설계를 위한 공리적 설계 이론을 세계 최초로 탄생시키게 된다.

 이 프로젝트 성공에는 석사 졸업후 첫 직장생활을 했던 구두제작기계 생산업체 ‘USM’과의 끈끈한 관계가 큰 도움이 됐다.

 “52년 만의 귀국입니다. 고교시절에는 수필을 못써 0점도 맞아 봤지만 과학자의 길에 후회는 없습니다. 이제 KAIST에서, 조국을 위해 나머지 열정을 태워보고 싶습니다.”

대전=박희범기자@전자신문, hbpark@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