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이 불철주야 일한 인건비조차 받기 힘듭니다. 이럴 땐 정말 사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대형 IT서비스업체를 통해 SW를 공급하며 불공정거래를 겪어본 중소SW업체 사장들이 하나같이 내뱉는 말이다. SW산업을 육성하자는 범정부 차원의 의지가 확고하고, 여기에 공감하는 업계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중소SW업체의 형편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형 IT서비스업체들의 불합리한 거래관행을 꼽는 이들이 많다. 때문에 대형 IT서비스업체의 SW 구매 과정에 변화가 없으면 SW산업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SW업계의 시각이다.
물론 IT서비스업체들도 할 말은 있다. 발주관행상 최저가 입찰을 요구하는 데가 많기 때문에 SW업체들과의 마찰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IT서비스업체들도 공공 프로젝트 수주 시 손해 안 보면 다행이라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결국 발주관행을 바꾸고 분리발주를 통해 IT서비스업체와 SW업체 모두를 살리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설자리 없는 중소 SW업체=A업체가 최근 독자 개발한 시스템을 모 전자회사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전자계열 IT서비스업체가 끼어들었다. 이 IT서비스업체는 견적작업과 네트워크 관리 등을 이유로 A사에 기술 자료를 요구했고, 결국 사업은 이 업체가 수주했다. 2년 뒤 이 전자회사의 해외공장에 똑같은 솔루션을 공급하는 과정에서도 이 IT서비스업체가 같은 방식으로 끼어들어 사업을 가로챘다. 업계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 뉴스거리도 아니다.
문제는 이것뿐이 아니다. 대금지급을 미뤄 SW업체들을 경영난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내 하도급 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된 분쟁은 2003년 4건에서 2004년 5건, 2005년에는 다시 6건으로 늘어났다.
건수는 적지만 을의 위치에 선 하도급자가 거래단절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한 조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불공정거래는 훨씬 더 많다는 게 협회 측의 설명이다.
하도급자인 B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업체는 6개월간의 개발 프로젝트를 과실없이 수행했지만 도급자가 하도급 대금 지급을 지연, 조정을 신청했으나 대금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차일피일 대금 지급을 미루는 바람에 돈을 떼이는 업체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제도적 장치 별 도움 안 돼=관계기관이 마련한 SW표준하도급계약서를 이용할 경우 계약내용으로 인한 문제를 대폭 줄일 수 있으나 표준계약서 사용 역시 강제사항이 아니고 권장사항이다 보니 이용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표면적인 제도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대형 IT서비스업체가 SW구매과정에서 창구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주 측이 대형 IT서비스업체와의 일괄 계약을 선호한 결과 중소기업은 하도급업체로 전락하고 여러 유형의 불공정거래가 발생하게 된다.
국내 중견SW업체 관계자는 “발주자→주계약자→하도급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어떠한 대안도 쉽사리 먹혀들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특히 공공 프로젝트는 99%가 이 같은 발주 형태를 가진다는 점에서 공공기관 발주 관행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발주관행 개선해야=IT서비스업체들은 발주관행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IT서비스업체들도 SW업체만큼이나 괴로운 일이 많기 때문이다. 최저입찰을 당연시 여기고 우선사업자를 선정한 후 가격을 더 후려치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한 누가 내상을 더 적게 입느냐가 문제일 뿐 IT서비스업체와 SW업체는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IT서비스업체 관계자는 “IT서비스업체로선 발주처의 요구를 거절하기 쉽지 않다”며 “대·중소기업 상생경영과 발주처의 마인드 개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하도급불공정 거래 개선 나서
정통부는 지난 3월 ‘SW공공구매 혁신방안’을 통해 SW하도급관련 불공정거래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았다.
정부는 우선 대기업 위주의 일괄계약에 따라 SW개발 작업량의 50∼60%가 하도급 처리되며 원도급가의 70% 수준에서 하도급가가 결정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발주기관의 하도급 구성에 대한 낮은 인지율이 불공정 하도급거래관행 개선에 걸림돌이 된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한국SW진흥원이 지난해 9월 조사한 ‘공공부문 SW계약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하도급 구성여부 인지율은 11%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시장규모에 비해 중소업체 간 하도급 경쟁이 심해 저가계약 등 불공정 하도급 계약이 상존한다는 분석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상반기에 공공기관의 정보화사업 발주 시 하도급 계약 내용을 발주자가 확인 및 관리하도록 ‘SW사업발주관리지침’에 이를 반영, 추진할 계획이다. 또 이 지침에 부당한 하도급 대금 결정 및 감액 유형을 추가로 명시하는 등 SW하도급 관련 규정 개정을 추진키로 했다. 이밖에 ‘SW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해 SW표준하도급계약서 활용을 강화할 방침이다.
SW업계는 “정부가 IT서비스업체와 중소SW업체 간 계약에 관여해 불공정거래를 줄이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업체 간 이면계약까지 확인하기란 사실상 어렵다”며 “완전한 분리발주와 같이 대기업이 SW구매과정에 관여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터뷰-조성구 대중소기업상생협회 회장
“불공정 하도급 관행이 개선되지 않으면 대형 IT서비스업체와 SW업체의 상생은 요원한 일입니다.”
조성구 대중소기업상생협회장은 대형 IT서비스업체가 중소 SW업체를 대상으로 겉으로 ‘상생’을 얘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강조했다.
IT서비스업체와 법적 분쟁까지 벌였던 그는 SW산업 전반에 걸친 구조적 문제에 대해 가감 없는 의견을 피력했다.
“대기업이 연구개발을 통해 제품을 개발할 자금과 조직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활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SW는 우월적 지위로 흔들면 제품 단가를 얼마든지 내릴 수 있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는 IT서비스업체처럼 전체 시스템을 통합하고 관리하는 역할은 필요하지만,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협력업체를 궁지로 몰아넣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이 불공정거래지 당하는 SW업체들엔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IT서비스업체와 SW업체 간 불공정거래가 비일비재해도 이를 시장의 관행으로 치부하는 상황이 더 큰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대형 IT기업의 이 같은 행태를 차단하기 위한 제재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공정위에서 적용하는 하도급법이나 부당경쟁방지법만 제대로 적용해도 대중소기업 상생이나 SW 분리발주와 같은 말을 꺼낼 필요도 없습니다. 관련 제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불공정거래를 당한 중소기업이 관련 제도에 의지하려 해도 이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설령 가린다고 해도 소규모의 과징금을 두려워할 대형 IT서비스기업은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협회는 대형IT서비스업체와 법적으로 맞서 이득을 본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SW기업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 IT서비스업체를 통해 제품을 공급한다고 하면 대출이 안됩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수익이 안 난다는 사실을 은행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최근 일부 대기업이 대·중소기업 상생 경영 움직임을 보이는 데는 고무적이라고 했다. 정부가 나서 상생 경영을 중요성을 알리는데다 일부 대기업이 이에 참여하며 분위기가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다만 최근 유가와 환율 문제로 상생 경영의 목소리가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다.
그는 “SW는 시장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중소기업형 산업”이라며 “원천기술을 가지고 글로벌 업체들과 경쟁하는 중소업체가 인정받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SW사업 비용구조·하도급 사례(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