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MA 상용화를 말하면서 몇몇 인사만을 거론하는 것은 맞지 않다.
정책 입안부터 CDMA 상용화를 둘러싸고 수 년간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던 96년까지, 당시 체신부를 책임진 장·차관은 물론 실무를 처리했던 공무원들, 상용서비스 주체 및 장비 개발 업체 등 소속을 넘어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수 백여명의 이름없는 엔지니어들 모두 CDMA 신화의 주인공들이다.
기술로 보면 80년대 시작된 TDX 교환기 개발 사업이 CDMA 상용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당시는 무선, 이동통신 기술이 전혀 없던 시기였고, 디지털유선교환기(TDX) 개발사업 노하우가 CDMA 상용화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했다.
그러나 ETRI가 주도한 CDMA사업에서 초기에 교환기 개발팀은 소외되었다. 이 때문에 삼성·LG·현대·대우 등 교환기 개발 4사 중 대우를 제외한 3사 역시 초기에는 교환기 개발 팀 대부분이 CDMA사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CDMA 도입결정은 91년 9월, 당시 체신부 송언종 장관과 윤동윤 차관 때 이뤄졌다.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된 93년에는 윤동윤 장관이 총대를 맸다. 이후 경상현 장관부터 96년 이석채 장관까지 체신부 주무부처 장관 모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당시 정부는 CDMA 중단을 심각히 검토했고, 또 상용화되던 해까지도 사업 중단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장·차관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93년 9월 한국이동통신(KMT)에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이 발족되자 CDMA사업은 본격화되었다. 관리단을 이끈 서정욱 박사의 역할은 주목할 만 하다<인터뷰 상자기사 참조>.
당시 정부 관계자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에 그만한 프로젝트매니저(PM)는 없었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 박사의 투입은 이미 도입을 결정한 후에도 2년 가까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마지막 ‘해결사’ 역할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서 박사는 10년 전인 83년에 한국통신공사(KTA) 자문위원, 84년부터 TDX사업단장, 품질보증단장을 겸임했다. 이에 앞서 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무전기 개발을 경험했다. 전문지식 측면이나 경험 면에서 당시 상황을 돌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 단장을 지원한 실무진영에서는 KTA에서 KTM으로 옮긴 이성재 부장이 꼽힌다. 이 부장은 KTA에서의 TDX 개발 노하우를 이후 KMT로 옮겨 TDX 기반의 대용량 CDMA 시스템을 만드는데 한 몫했다.
당시 ETRI는 경상현 소장, CDMA기술을 도입한 이원웅 박사(현 인천대 교수) 체제에서 양승택 소장, 안병성 이동통신개발단장 체제로 최고 경영진이 바뀌었다.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 발족으로 KMT의 이성재 부장이 사용자 요구사항을 제시하는 등 CDMA사업을 총괄하며, ETRI는 교환기기술이 없는 현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박항구 교환기개발단장을 이동통신개발단장으로 보임했다.
장비사들의 CDMA 주역으로는TDX개발의 주역이었던 LG의 조정주 부사장, 삼성의 홍순호 상무, 현대의 김철규 이사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정통부에 남아있는 당시 관계자로는 신용섭 현 전파방송국장과 서석진 현 광대역융합과장 등 극소수다. 신 국장은 계장, 과장 시절 정통부 내부에서 세 번의 보직변경을 하면서도 CDMA 사업을 계속 맡아와 당시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서 과장은 당시 관리단으로 2년간 파견근무를 했다. 상충한 이해관계 속에서 사업이 삐걱거리지 않도록 원활한 의사소통을 맡아야 했으니, 당시 관계자들은 “온갖 잡음 속에서도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소신있게 행동한 공무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신혜선기자@전자신문, shinhs@
◆서정욱 박사…“과학은 지식과 기량, 둘 다 필요하다”
13년 전이다. CDMA 상용화 기준으로는 올해가 10년이지만, 서정욱 박사(72)에게 CDMA 시작은 상용화를 위해 사업을 처음 맡았던(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장) 1993년부터다.
‘PM으로서 대학민국에 이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평가가 꼭 달가운 일이 아님을 서 박사는 안다. 오히려 당시 상황을 돌이킬 때 서 박사의 발탁은 인심을 잃어가며 사업을 추진하는 ‘엄격하고 냉정한 일처리’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관리단을 맡으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공동개발 방식을 경쟁개발로 바꾼 것. 정부도 업체도 연구소도 모두 아연 해했다. 그러나 서 박사는 이들에게 “당신들을 끌고 갈 기관차에 엔진이 있는지, 기관사는 자격증이 있는지, 목적지가 어딘지, 언제 떠나 언제 도착하는지, 그리고 요금이 얼마인지 따져보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기술 노하우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에서 도저히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목표에 임하는 당시 관계자들의 모습이 서 박사 눈에는 ‘폐차장에 가서 부속품을 조립해 자동차를 만들고, 자동차를 생산했다고 자랑하는 상황이 될’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될 것이라는 확신보다는 해야한다는 의지만으로 추진한 CDMA 사업. 서 박사는 어떤 경험을 남겼을까. 서 박사는 “과학기술 원리를 응용해 실용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설계, 연구, 개발, 시험, 평가, 품질보증, 생산기술, 운영유지보수, 교육, 그리고 폐기까지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연구개발에 임하는 공학도로서 기본을 갖추지 못한 채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우리 현실의 문제점을 더 근원적으로 지적한다.
서 박사는 ETRI가 퀄컴의 기술을 도입할 때 한국 운용업체의 이동통신 시스템 시험평가 및 운용기술, 한국 제조업체의 교환기 설계, 제조 및 품질보증 기술 등을 협상무기로 쓰지 못한 무능과 과오를 못내 아쉬워한다. “앞으로는 연구개발 분야에도 더욱더 기업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질 것”이라며 “지식과 기량(스킬) 둘을 모두 갖춰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신혜선기자>
◆그때 그런 일이…CDMA 상용화 뒷 얘기
◇ 89년 한미통상압력을 빗겨가 시간을 벌다 = 당시 미국은 VAN 사업과 단말기규격 자율화, 국제전화, 무선호출, 차량전화 등의 통신 시장 개방을 강도 높게 요구했다. 당시 정부 분위기는 반도체나 자동차 수출 의존도가 워낙 컸기 때문에 통신을 양보하자는 목소리가 컸다. 이 고비를 넘기는 데는 당시 공무원들의 교섭력이 한 몫 했다. 89년 협상 당시 우리 정부는 어느 나라도 무선통신을 외국이 하는 법은 없다며 지분 개방 요구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우리 정부가 취한 역공은 미국 역시 무선시장을 개방하지 않고 있다는 점. 당시 FCC법에는 ‘무선통신의 외국인 지분을 20% 이하로 제한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미 협상 측 대표가 그 사실을 몰랐던 터라 우리 측의 공략에 당황했다”며 “미국법부터 고치라는 주문에 한 발 물러섰다”고 전했다. 당시 무선통신 시장 개방 요구에서 버텼기 때문에 CDMA 기술 개발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얘기다.
◇ 삼성전자도 처음엔 CDMA를 반대했다? = 현재 이동통신 최고 리더로 꼽히는 삼성전자. 그러나 삼성전자도 처음부터 CDMA 도입을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정부가 디지털 이동전화 도입을 결정할 무렵, 당시 삼성전자 J 전무는 정부 관계자를 구미로 은밀히 초청했다. “구미 철문을 두 번 열고 들어간, 당시 최고 보안이었던 삼성전자의 사업은 다름 아닌 아날로그 시스템 개발이었다”는 당시 정부 관계자의 증언이다. 교환기 개발에 이어 제2 무선호출 사업으로 대박을 터뜨린 삼성전자는 통신산업의 가능성을 읽었고, 미국 아날로그 이동전화 벤처를 인수, 극비리에 시스템 개발에 이미 착수했던 것. 당시 200억원 가깝게 투자한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디지털 전환이 오히려 걸림돌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물론 이후 삼성전자는 CDMA 상용화, 특히 단말기 전략에 ‘올인’ 했으며, 96년 ‘한국지형에 맞는’이란 모토로 지금의 애니콜 신화의 첫발을 내디뎠다.
◇ 경쟁개발, CDMA 성공요인 = 우리가 세운 CDMA 상용화 목표는 96년도. 그러나 모토롤라에서는 “98년 이전에 상용화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힐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CDMA 상용화 성공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경쟁개발 방식 도입’이다. 1차 장비 평가. 삼성이 1등을 하고 LG가 3등을 했다. 당시 겨우 교환기술을 익혔던 현대에 졌던 LG는 ‘치욕의 날’이라고 말할 정도. 당시 구자경 LG 회장은 자금, 인력 등 모든 지원을 약속하고, 다음 평가를 기약했다. 그러나 사실 내용상으로 LG가 결코 3등이 아니었다. 보드 2인 기준의 모토롤라 방식보다 높아야 기술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개발 진의 판단으로 4인 기준으로 바꾼 것이 화근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삼성을 앞선 발상이었다. 1등 한 삼성이 LG의 설계를 보고 가슴을 쓸고, ETRI 연구진과 합숙에 들어가 바로 설계를 번경한 일화는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LG는 신세기이동통신 장비납품에서 탈락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돼 SK텔레콤이란 대고객과 관계를 텄다. ‘날 밤새는 기술개발’로 이어진 선의의 경쟁과 엔지니어의 피땀 흘린 노력을 외국 통신장비사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 애증의 퀄컴, 아군 혹은 적군? = 94년 시스템 상용 시험과 동시에 단말기를 개발할 때다. 상용화된 CDMA계측장비가 없던 때라 대전 ETRI 구내에 설치돼 있는 퀄컴의 시범용 시스템 장비(RTS)에서 나오는 전파가 유일한 CDMA 신호였다. KMT 및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은 이 신호를 잡을 수 있는 거리의 호텔에 투숙했다. 일박 30만원의 스위트룸이 단말기 개발실이 된 셈. 당시 ETRI L 부장은 서박사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밤에도 RTS 신호를 제공하기 위해 장비 전원을 키고, 순찰 도는 수위가 전원을 끄면 달려가서 전원을 키곤 했다. 퀄컴 엔지니어의 지원도 있었다. 95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때. 해가 바뀌면 상용화를 해야하지만 버그는 여전했다. 홍콩 출장차 한국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들린 퀄컴 엔지지어들이 KMT 사장실에 ‘인질로 잡혔다’. “상용화를 위해 당신을 인질로 잡을 수밖에 없다”는 당시 서정욱 사장의 말에 퀄컴 엔지니어들이 휴가를 반납하고 마지막 디버깅을 했다. 미국 샌디에고 퀄컴 사무실도 마찬가지. “(당신의) 피 말리는 노력을 보고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게 당시 퀄컴 엔지니어의 인사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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