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서구형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생긴 것은 1998년 강변 CGV가 처음이다. 당시만 해도 생경했던 멀티플렉스라는 단어는 2006년 현재 단관 영화관이 오히려 드물 정도로 우리 생활 가까이 다가왔다. CGV·메가박스·롯데시네마 등 대표적인 멀티플렉스만 해도 64개에 이르고 6∼8개 관을 갖춘 기본형 멀티플렉스는 연간 150만∼200만명의 관객을 유치해야 수지가 맞는다는 통계도 있다. 정말 엄청난 인구가 멀티플렉스를 찾는다.
멀티플렉스의 번창은 국내 영화산업, 나아가 문화산업의 변화 양상을 잘 보여준다. 문화산업은 시장규모가 자본이나 소비 측면에서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는데다 질적인 변화도 감지된다.
문화산업은 멀티플렉스의 사례에서 보듯 이미 우리 소비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여타 제조업에 비한다면 아직은 작은 규모라 할지라도 내포된 경제적 가능성은 매우 크다. 경제적 가능성뿐 아니라 문화적 중요성이 점점 커지면서 세계 각국이 앞 다퉈 각종 문화산업 진흥정책을 내놓고 있다.
문화산업에 대한 사회 안팎의 관심과 비례해 관련 서적도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져 나온다. 지난해 나온 책 중 ‘세계 디지털 리더 60인이 말하는 유비쿼터스의 최전선’이라는 책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마이클 파월 전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 의장의 “정부여, 기술에 귀기울여라”는 말이었다.
마이클 파월은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충격을 ‘핵분열’의 파괴력과 비교하면서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을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으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충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이 과정에서 정부의 정책이야말로 가장 변화해야 하며 무엇보다 경제 주체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동기와 능력을 갖추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파월의 지적처럼 오늘날과 같이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시대의 정부 규제는 기술의 발전 방향과 특색에 맞춰 이뤄져야 하나 많은 규제가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기술 관련 정책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만이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역할, 즉 시장의 새로운 혁신에 필요한 자금이 잘 공급되도록 정책을 설정하고 혁신이 지속되도록 장기적인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디지털 대변혁의 와중에서 정부가 귀 기울여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목소리는 바로 문화콘텐츠 소비자에게서 나온다. 바야흐로 생산의 흐름이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즉 선택을 강화하는 생산으로 바뀌고 있으며 표준화가 아니라 개인 고객화가 중요한 생산의 지향점이 됐다.
통신기술에서도 더는 일대다(一對多) 통신기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대일(一對一) 통신기술 시대로 진입하게 됐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소비자들은 이제 단순한 규제의 대상이 아니며 적법한 콘텐츠에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 응용 서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문화산업 선진국으로서 일본의 경쟁력은 여러 차원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특히 마니아층(오타쿠)이 폭넓게 존재하면서 문화콘텐츠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상황, 즉 소비자들이 우수한 콘텐츠를 걸러내는 생산적 거름망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주요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소비자는 더는 소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에 기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도 과거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맞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기술과 소비자에 귀기울일 것.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문화산업 정책을 꾸려가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화두가 아닐까.
◆이연정 문화관광정책연구원 문화산업연구실장 yuliana@kctp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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