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산 국제시장에서의 창업.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CEO.’ 남들이 나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즐겨쓰는 말이다.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이다. 넉넉지 않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8세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을 건사하며 어렵게 성장한 것이 그렇고, 나이 오십 넘게 살아오면서 남에게 크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을 바탕으로 이 자리까지 온 점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군 입대 전에 고향인 부산에서 고학으로 대학(전자공학과)을 졸업한 후, 국제 시장에 있는 가전 제품 서비스센터에 취직하여 1년 정도 일을 하였는데, 군 제대 후인 1976년도에 그때의 경험과 전공을 살려 가전 제품 수리 센터를 열었다. 주로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개는 다른 곳에서 고치다가 실패한 제품들이었는데, 손재주가 비상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손재주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아마도 무엇이든 주어진 과제에 대한 근성과 도전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그 덕분에 당시 사업 재미를 꽤 보았으나, 1년여가 지난 어느날 문득,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끝에 가전 제품이 아닌, 스케일이 큰 산업용 제품으로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고 1977년 국제 시장 상가 건물 3층에 보증금 2백만원짜리 사무실을 얻어 직원 1명과 함께 오토닉스의 전신인 국제전자를 창업했다. 당시 내 나이 26세. 돌아보면 그때의 결정이 오늘의 오토닉스를 탄생시킨 첫 단추였던 셈이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지금 생각해봐도 20대 중반인 약관의 나이로 가전 제품 수리점을 운영하여 당시로선 적지않은 돈을 만지던 그때, 어떻게 그런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나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내 핏속에 흐르는 ‘도전 정신’, 즉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성취에 도전하려는 마음이 그런 결정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하는데, 오늘의 나 자신과 오토닉스를 일궈온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그 이후, 그 동안 쌓아온 기술력에 대한 평판을 바탕으로 각종 산업용 전자 장치를 개발해 주는 소위 엔지니어링 사업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항구 도시 부산에 수요가 많았던 어선에서 사용하는 집어등 자동 전력 조절기 개발을 비롯, 자동 선반용 디지털 컨트롤 박스, 부산 시내 교통 신호등 디지털 자동 제어기 등을 개발했다.
특히 자동 선반용 콘트롤 박스를 국산 개발에 성공하여 납품하고 손에 쥔 목돈으로 결혼하고 집장만도 하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제품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방직기용 디지털 컨트롤 박스(일명 셔틀 체인지)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당시 전량 일본 제품을 수입해서 쓰던 제품이었는데, 개발에 성공하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던 제품 개발에 밤낮없이 매달려 마침내 개발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제품을 장착한 자동 방직기가 1981년 당시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섬유 기계전에서 큰 관심을 끌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단위 물량을 수주하여 당시로선 꽤나 큰 돈도 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작은 성공에 취해 있을 때, 내 가슴속에는 새로운 목표를 향한 도전의식이 또다시 발동하였다. 즉, 고객의 필요에 따라 제품을 개발해 납품하는 엔지니어링 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어진 것이다. seoul@autonic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