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통신시장을 읽는 키워드는 ’신뢰의 붕괴’다.
시장, 정책, 기술, CEO 등 통신산업을 한눈에 보여주는 각종 신뢰지수가 거의 바닥을 치고 있다. 경쟁관계인 사업자와 사업자 간은 물론이고 규제기관과 사업자 사이도 예전같지 않은 눈치다. 기본적으로는 나눠 먹을 떡(시장)이 넉넉지 않다는 이유가 크지만 현 상황은 그리 단순치 않다. 무엇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신뢰의 붕괴가 이루어져 회복의 단초를 찾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지속될 경우 시장의 불확실성을 부추겨 우리나라의 성장동력(IT) 상실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최대 과징금 부과 운운하는 공정위 심결은 통신시장 신뢰붕괴의 결정판이다. 다행히 최종 판결은 25일경으로 연기됐지만 그 과정은 한 편의 ‘슬픈(?) 코미디’다. 사업자를 마치 범죄인 취급하는 공정위의 플리 바게닝(plea bargaining)으로 KT와 하나로텔레콤의 동업자적 신뢰는 깨진 듯하다.
게다가 공정위의 사업자 조사 과정에서 사업자와 규제기관인 정보통신부 간 믿음도 엷어졌다. 출혈 과당경쟁을 막아 보자는 정통부의 정책이 담합을 유도했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당시 정황을 보면 사업자가 무조건 오버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정통부의 우산 역할을 기대했던 사업자들의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올 초 시장혼탁의 주범을 초기에 처벌하겠다고 공언한 통신위는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렸다. 3월 KT재판매와 LG텔레콤 보조금은 나둔 채 4월에 움직인 SK텔레콤에 무려 231억원의 과징금을 부여한 것은 분명 당초 공언과는 다른 처사다.
CEO들의 신뢰 하락이 통신산업 전반에 끼치는 영향은 더 크다. 통신산업의 수장 격인 진대제 장관의 경우 각종 자치단체장 출마설이 끊이지 않으면서 정통부 정책의 연속성에 대한 우려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IT839의 지속적인 추진과 함께 통·방 융합 기구 개편 과정에서 정통부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임기를 세 달 남겨둔 이용경 KT 사장의 재임 여부를 둘러싼 논란도 통신시장의 불투명성을 부추기는 한 단면이다. KT의 움직임이 전후방 산업에 주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김신배 SK텔레콤 사장 역시 공공연히 단말기 제조업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해 온 것과는 달리 최근 사업 매각이라는 깜짝 카드를 내놓아 눈길을 끈 경우다. CEO로서 기업의 장기 비전을 얘기해 왔지만 결국 성장전략과 규제환경에 따른 갑작스런 방향선회로 시장에 구구한 해석을 낳고 있다.
미래 기술에 대한 신뢰 하락도 빼놓을 수 없는 현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밋빛 일색이던 통신 신기술에 대한 평가가 WCDMA, 와이브로로 오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다.이들 서비스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불신이 제기되면서 ‘사업자의 투자 이행 불가시 처벌 강화’라는 네거티브한 정책이 도출되는가 하면 사업권 포기라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통신사업자의 주가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부분도 통신시장의 미래가치에 대한 신뢰가 붕괴됐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보면 분명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신뢰의 붕괴는 그 자체로는 고의나 악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신뢰라는 부분은 정확한 측량 대상이 아니면서도 시장의 활황과 불황을 결정하고 선순환을 위한 정책적 입지를 정하는 가장 큰 변수라는 점은 분명하다. 통신 전반에 횡행하는 신뢰 붕괴를 조속히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다.
김경묵부국장@전자신문, km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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