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자산업은 지난 70년대 초, 핵심부품이나 소재를 일본이나 미국에서 수입해 조립하는 형태로 성장해왔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반도체·휴대폰·디스플레이 등 세트 강국인데도 불구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실력 있는 전문 부품·소재업체는 드물다.
문제는 세트의 경쟁력도 결국엔 이를 구성하는 부품·소재의 질(質)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한 나라 전체 산업의 경쟁력 역시 부품·소재 기술에 달렸다. 핵심 부품을 사와서 조립하는 형태의 세트사업은 경쟁력이 없다. 부품·소재산업의 자립기반이 없이는 물량중심의 세계 1등 역시 무의미한 것이다.
이미 지난 80년대, 미국·일본·독일 등 선진국들이 풀 세트(Full-Set)형 산업구조에서 핵심 부품·소재 중심으로 전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전체 제조업 생산의 1/3을 소재산업이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 산업경쟁의 패러다임 자체가 세트 중심에서 부품으로 바뀌고 있다. 세트제품의 조립생산 능력이 평준화되면서 부품·소재 기술이 기업 및 산업경쟁력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실제로 인텔·보쉬·델파이 등 거대 다국적 부품기업은 세계표준을 선점하며 부품·소재중심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 전세계 컴퓨터의 80% 가량이 ‘인텔 인사이드(Intel-inside)’ 구호 아래 인텔 칩을 장착한다. 보쉬는 디젤차용 커먼레일(common rail)이나 에어백용 인플레이터 등 표준화된 모듈부품으로 완성차의 설계까지 좌우한다.
이런 가운데 값싸고 품질만 보장되면 전세계 어디서라도 부품을 조달하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 전략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부품업체 간 인수·합병(M&A)을 통한 대형화·전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델파이가 브레이크 전문업체 서브레이크를 인수하고 보쉬가 연료분사장치 업체 젝셀을 합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들 세계적인 부품·소재 기업들은 기술장벽을 강화하며 독과점 형태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보쉬·델파이·덴소 등 3개사가 전세계 자동차용 디젤엔진 연료분사장치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품·소재산업은 전체 제조업 생산액의 38%, 종사자의 46.3%, 수출입의 40% 이상을 점유하는 국내 제조업의 중추다. 완제품 생산원가와 부가가치의 60% 이상을 부품·소재가 차지한다. 견실한 무역흑자 기조의 정착은 물론 고용 있는 성장 달성을 위해서도 부품·소재산업의 육성이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품·소재 기술은 선진국 대비 80% 수준에 불과하다. 원천기술을 포함한 첨단 부품·소재는 아직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50인 이하 소규모 기업이 전체 부품·소재기업의 89.5% 차지하는 등 대형화·전문화된 부품·소재 기업도 부족하다. 회사 규모가 영세하다 보니, 대기업과의 종속적 계열화가 고착돼 납품단가인하나 납품수량 확보 불안 등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한국 부품·소재산업의 미래는 밝다. 우리나라는 핵심 원천기술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IT·자동차·조선 등 세트산업 부문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부품·소재의 대규모 수요처인 주력기간산업이 건재하다는 얘기다. 내수 기반이 튼튼하다는 얘기는 그만큼 성장 가능성도 크다는 의미다.
주변 경쟁국 상황도 그리 불리하지만은 않다. 일본은 세트와 부품업체 간 계열관계가 약화되고 급속한 고령화·고비용화로 생산거점의 해외 이전도 가속화되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도 아직까지 핵심부품·소재 공급 능력은 취약하다. 한·중·일 3국간 분업구조 아래 우리나라가 기술집약적 부품·소재 공급의 최적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전자 및 자동차 부품을 중심으로 전략적 제휴나 투자유치를 통해 글로벌 공급을 확대하는 대형 부품·소재기업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심텍이 생산하는 메모리모듈용 인쇄회로기판(PCB)은 삼성전자나 하이닉스는 물론 마이크론·인피니온·난야 등 세계 ‘빅5’ 칩 메이커에 모두 공급된다. 만도는 GM, 다임러에 ABS 및 조향장치 공급하고 있다. 우영도 미국 페터스에 LCD모듈을 수출했으며 한라공조는 크라이슬러에 컴프레스를, 동양기전은 GM·오펠·사브 등에 와이퍼모터를 공급하고 있다.
부품소재통합연구단 이덕근 소장은 “부품·소재 산업 육성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전제하며 “주문자상표부착(OEM)과 같은 종속적인 생산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차별화된 제품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장기적으로는 국제적 분업체계를 갖춘 글로벌 경영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상돈기자@전자신문, sdjoo@
◆부품·소재산업 발전전략
‘매출 2000억 원, 수출 1억 달러를 초과하는 중핵기업 300개 육성’
오는 2010년까지 우리나라를 핵심 부품·소재산업의 세계적 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정부가 수립한 전략 목표다. 여기서 중핵기업은 모듈화 방식의 생산과 함께 국내시장뿐 아니라 해외시장 진출이 가능하고 중견기업을 초과하는 규모의 기업을 말한다. 모듈부품을 생산하는 중핵기업이 부품·소재 공급체계에서 기술혁신을 주도함으로써 기술 파급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중핵기업 육성을 위해 정부는 현재 단기중심의 소규모 살포식, 개별기업형 지원에서 중장기 대형과제 중심으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키로 했다. 원천기술이 포함된 대형 모듈단위 과제를 중심으로 중핵기업을 중점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기업 성장단계에 맞는 맞춤형 지원시책을 추진하고 수·급기업간 공동기술개발도 모색된다.
아울러 정부는 △부품·소재기업 특성에 따른 혁신역량 확충 △유형별 핵심기술 확보 △개발된 부품·소재의 사업화 촉진 △부품·소재 기업의 글로벌 수출기업화 지원 △혁신클러스터 확산기반 구축 △부품·소재산업 혁신촉진형 제도 정비 등 6가지 발전전략도 수립했다.
특히 총 1조 5000억 원 규모의 차세대 부품·소재산업 육성자금을 활용, 부품·소재의 사업화 및 생산설비 투자에 대한 금융지원을 확대키로 했다. 부품·소재기업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완화하고 현재 국방기술개발자금의 9.2%인 부품·소재개발 비율도 15%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 같은 과제들이 차질없이 추진되면 오는 2008년, 우리나라 부품·소재 산업의 생산액은 50% 이상 늘어나 400조 원대에 이를 전망이다. 아울러 국내 제조업 외화가득률이 75%에 이르는 등 핵심 부품·소재의 대외 의존도가 크게 낮아져 산업 전반에 걸친 고부가가치화도 가능해진다. 부품·소재 산업의 고용비중도 50% 수준까지 증가, 우리 경제의 ‘고용 있는 성장’을 견인하는 중추 산업으로 발돋움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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