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TV 프로그램, 음식, 패션에 이르기까지 퓨전(융합) 현상이 금세기 초를 풍미하고 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현대적인 인물을 가미하여 시청자를 사로잡은 퓨전 사극 ‘다모’처럼 서로 다른 것을 섞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작업이 새로운 문화 창조의 원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융합 현상은 시대나 분야, 장르를 초월함으로써 상상력과 창의성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시대 사조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이나 ‘섭렵(涉獵)과 편력(遍歷)’이라는 학문 수양의 명제들이 실은 융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짧지 않은 일생은 섭렵과 편력의 본보기다. 그는 르누아르·뭉크·고갱·고흐·고야 등의 영향을 받았고 스페인 고대미술, 카탈루냐 중세조각, 아프리카 흑인조각을 섭렵했으며 아폴리네르·마티스 등과 사귀고 세잔의 가르침을 받아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 운동을 시작했다. 신고전주의나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여하고, 특유의 표현주의를 개발했다. 폭넓은 교류와 끊임없는 토론은 그의 일상생활이었다.
과학기술에서도 융합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제는 과거처럼 수직적인 협력 관계보다는 통합된 형태로 시스템적 요구사항이나 가능성 실현을 위한 융합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MEMS를 기초로 한 분자진단시스템, 생체를 모방한 로봇 등은 여러 분야 기술의 융합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에서는 NBIC라는 신조어를 선보였는데, 이는 나노기술(NT)·생명공학(BT)·정보기술(IT)·인지과학(CS)의 융합을 의미한다. 나노기술의 거장들은 2020년께 기존의 물리·화학·생물·재료·전자·기계 등의 학문 분야가 나노과학기술로 대통합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물리학자가 복잡한 분자식을 외우고, 화학자는 전자공학을 습득하며, 기계공학자는 바이러스를 관찰하고, 재료공학자는 양자역학을 학습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세계 유수 연구소로 도약하기 위해 선정한 5대 중점 연구영역은 기초·원천분야 중 다분야 융합기술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나노재료·소자기술 분야는 IT·NT·재료, 지능형 인간-컴퓨터 접합(intelligent HCI) 분야는 IT·로봇·소프트웨어, 생리활성 선도물질 분야는 BT·IT가 융합되어야 하는 기술이다. 이 중에서도 지능형 인간-컴퓨터 접합 분야는 이공계 전문가 뿐 아니라 예술, 인문 및 사회과학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융합 연구 분야에서 가시적인 성과도 도출되고 있다. 최근 과학기술부가 세계 10대 기술로 선정한 캡슐형 내시경 ‘미로’는 재료·기계·전자·화학·의학이 융합돼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반도체·자성재료·전자·물리 분야가 협력하는 스핀트로닉스 연구사업도 융합기술의 좋은 사례다. 또 국내 최고 성능의 리눅스 슈퍼컴퓨터를 구축하여 국내외 화학·기계·재료·물리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함으로써 NT-BT-IT연구의 소프트 사이언스화를 선도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융합은 산업기술의 혁명적 발전을 통한 선진국 도약은 물론 수명 연장, 삶의 질 향상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기술 융합을 통해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복지사회가 도래하려면 사회·경제·정치·교육·윤리·환경·법 등 사회 전 분야가 융합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도 과학기술의 급속한 융합 시대에 대응하여 과학기술자가 앞장서서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협업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김유승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yosekim@kist.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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