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초 필자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근무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15년 이상 벤처투자로 쌓은 지식과 경험이면 미국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미국 벤처캐피털리스트들과 일해 본 결과 벤처투자에 대해 아직 문외한이며 벤처캐피털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상당한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미국의 벤처투자시스템과 축적된 노하우는 한국식 벤처투자에 익숙한 필자에게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 주었다.
99년 여름 귀국 후 필자는 한국 벤처투자업계의 큰 변화에 놀랐다. 기업은 설립 후 창업투자회사나 엔젤투자자에게 투자를 받아 자기자본 형태로 자금을 조달하는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또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한 코스닥시장은 벤처투자자에게 효과적인 회수시장을 제공해 줘 벤처캐피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벤처투자시스템에 대한 개념이 취약한 상태에서 정부는 맹목적인 벤처 지원책을 펼치고, 투자자나 사업가들은 단기 이익만을 위해 내달리다가 종국에는 채 정립되지도 않은 벤처투자시스템을 망가뜨려 버리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먼저 용어의 혼란과 이로 인한 정책의 모호성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벤처기업을 정부 법령으로 규정해 놓고 혜택을 주면서 관리하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필요성은 인정된다. 그러나 과거 90년대 중반까지 정부가 운영하던 유망 중소기업 지원책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이름만 벤처기업 육성 지원책으로 바꾸고 미국에서 성공한 벤처투자시스템의 껍데기를 가져다 기존 정책에 장식품으로 조금 더해 놓았던 것은 아닌가 싶다. 정작 벤처의 본고장인 실리콘밸리에는 벤처기업(venture company)이 없다. 다만 벤처캐피털이 투자한 기업(venture-backed company)만 있을 뿐이다.
벤처기업 하면 벤처캐피털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미국 시스템의 핵심은 자유로운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선별된 기업의 자금통로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벤처캐피털이다. 벤처캐피털은 본질적으로 광범위한 일반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소수의 유망한 기업을 엄선하여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큰 이익을 얻기 위해 투자하고 관리하고 투자금을 회수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금융업이다.
이제는 일반 중소기업에 대한 폭넓은 지원시스템에서 벤처캐피털을 분리하여 그 특성에 맞는 별도 정책과 자원을 가지고 육성함으로써 소위 스타기업을 키워 내는 벤처투자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 모태펀드 및 공공부문의 벤처투자조합 출자 확대는 바람직한 정책이다. 다만 40∼50%에 달하는 펀드 매칭 비율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다. 투자심사와 투자기업관리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은 벤처캐피털리스트보다는 자금조달 재주가 있는 대기업 계열 창투사나 단기금융 전문가들을 더 유리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으므로 전문적인 벤처캐피털을 육성하려면 개선되어야 한다.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스타기업을 육성해야 하며, 그 육성시스템의 주인공인 벤처캐피털도 역시 다양하고 창의적이어야 한다. 몇몇 대형 창업투자주식회사는 의사결정 구조상 다양하고 창의적인 투자활동이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현재 거의 유일한 투자조합재원인 공공부문의 조합출자가, 비록 규모가 작고 자체적인 자금조달 능력은 취약하지만 전문적인 역량을 통해 조합 운영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건전한 중소형 벤처캐피털에 대해 우선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배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벤처투자업계는 나름대로 양적인 성장을 했다. 이제 우리나라의 벤처캐피털도 선진시스템으로 정비하고 전문적인 역량을 키워야 한다. 벤처투자시스템에 대한 확실한 철학을 갖고 창의적이며 전문적인 경험을 쌓은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능력을 마음껏 펼침으로써 스타기업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벤처투자업계가 되길 바란다.
<이윤식 CKD창업투자 대표 yslee@ckdvc.co.kr>
오피니언 많이 본 뉴스
-
1
[ET톡] 무엇을 위한 징벌적 과징금인가
-
2
[ET시선] 'AI 기반 의료체계 수출'로 패러다임 바꾸자
-
3
[부음] 정훈식(전 에너지경제신문 부사장)씨 장인상
-
4
[ET단상] 무겁고 복잡한 보안, 이제는 바꿔야 한다
-
5
[정유신의 핀테크스토리]토큰 증권, 발행은 되는데 거래는 왜 활성화되지 않나
-
6
[인사]한국건설기술연구원
-
7
[부음] 김재욱(금융투자협회 전문인력관리부장)씨 부친상
-
8
[부음] 김금희(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씨 별세
-
9
[부음]김규성 전 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 회장 모친상
-
10
[부음] 정홍범(전 대구시의원)씨 별세
브랜드 뉴스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