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원(현재의 KAIST)이 1971년 2월 16일 발족했다. 초대원장에는 원자력 원장을 역임한 이상수 박사, 초대부원장에는 당시 뉴욕공대의 프라즈마 연구소장으로 재임 중이던 내가 선임됐다. 한국 정부에서는 KAIST 사업이 원래 구상대로 성공하려면 당초 사업제안서를 썼고 미국이 파견한 터만타당성조사단의 일원으로서 나중에 KAIST의 청사진이 된 터만보고서의 초안을 쓴 나더러 꼭 실무책임자로서 부원장직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뉴욕 공대 교수로서 부임한 후 미국과학재단과 원자력위원회의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받아 새로운 프라즈마 연구소를 창설해 20명이 넘는 석박사 과정 학생을 지도하면서 세계 최첨단 프라즈마 발생 장치를 개발하고 연구하던 나로서는 한국과학원 부원장직의 수락은 너무 아까운 연구 기회 희생을 의미했다. 이제서야 독창적인 연구업적을 쌓을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해 놓고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조국의 과학기술 기반형성을 위해 하나의 밀알로서 희생해야 하는지 정말로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었다.
한 나라의 과학기술 능력이 세계 선두에 서려면 3세대가 지나야 한다는 초대 원자력원장 김법린 박사의 말씀이 떠올랐다. 기초기반을 닦는 제 1세대와 세계수준급의 연구 활동을 전개해야 하는 제 2세대와 새로운 과학기술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제 3세대가 잘 연계되어 발전해야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선진국 수준이 된다는 이론이었다.
귀국해 제 1세대 과학기술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에 남아서 제 3세대 과학기술에 도전하는가 하는 기로에 섰던 나는 코넬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한 롱 교수와 뉴욕 공대의 학과장인 올리너 교수에게 진지한 자문을 구했다. 두 분 모두 한국을 위해서는 과학원 부원장직을 맡아야 하나 개인적으로는 뉴욕 공대 교수로서 연구 업적을 더욱 쌓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하시면서 개인의 직업은 본인이 최종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귀국해서 조국에 봉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을 한 후 롱 교수와 다시 의논했더니 그렇다면 자기가 코넬 대학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과학기술사회연구실(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 STS)을 KAIST에도 만들라는 것이었다. 캐나다 국제개발연구소(IDRC)의 과학정책 담당 부소장이었던 올드햄 교수도 내가 STS연구실을 연다면 연구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귀국 후 KAIST 설립 업무와 동시에 윤덕용 전 과학기술원장, 박찬모 현 포항공과대학 총장, 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조경목 전 과학기술부 차관, 송옥환 현 세종대학교 부총장들과 함께 STS 연구실을 열게 됐고 IDRC의 연구비 지원으로 3년간에 걸친 한국과학기술의 장래를 구상하는 과학기술정책수단 (STPI) 연구사업을 착수했다.
30년전 KAIST에서 시작된 STS연구는 지금도 이진주 교수 (전 산업기술연구원장)팀에 의해 지속되고 있고 과학기술정책수단(SIPI) 연구사업의 결과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개발도상국가의 과학기술 정책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kunmochung@kast.or.kr
사진: 1971년 4월 14일 한국과학원 설립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이 김기형 초대과학기술처장관으로부터 한국과학원 완공 모형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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