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를 넘어 시스템 강국으로](1부)칩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②

◆칩과더불어 사는세상

‘우리 생활의 3대 필수요소는? 공기, 물 그리고 반도체’

김현대(39)씨는 알람시계 소리에 눈을 뜬다. 알람시계 속에 숨어있는 타이밍컨트롤러 칩도 같이 활동을 시작한다. 김씨는 눈을 비비며 TV 리모콘으로 32인치 LCD-TV를 켠다. 리모콘 속의 칩 2개 칩과 LCD-TV의 LCD컨트롤러 ASIC, SD램, 8비트 CPU, 디스플레이 구동 IC(DDI), 화질개선 칩, 영상신호처리 칩 등 약 50여 개의 잠 들어 있던 칩들도 기지개를 켠다. 전동 칫솔을 집어든다. 간단한 컨트롤 칩이 작동한다.

김씨는 아파트를 나서며 디지털 도어록으로 문을 잠근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 자동문을 지난다. 주차장으로 다가서며 자동차 리모콘을 누른다. 김씨의 움직임에 따라 컨트롤러 칩들이 10여 개 칩들이 빠르게 활동한다.

자신의 차인 중형 세단의 시동을 건다. 160여 개 칩들이 작동을 시작하며 쉬고 있던 자동차의 모든 기능이 활동을 시작하거나 대기 모드에 들어간다. 마이크로콘트롤러 칩 30개, 메모리 6개, ASIC 5개, 파워 칩 40개, 아날로그 칩 40개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회로 칩의 형제 격인 여러 개의 LED(발광다이오드) 모듈과 CCD(고체촬상소자) 등도 함께 움직인다.

운전 중 휴대폰 벨이 울린다. 핸즈프리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는다. 최근 L전자 최신모델 카메라폰으로 바꾼 김씨의 핸드폰 속에서 30-40개 칩이 빠르게 작동한다. RF칩·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모뎀칩·메모리 등등의 칩들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활동한다. 회사에 도착해 노트북을 켠다. 1년 전에 구입한 그의 노트북에서도 200여 개 칩이 서로 역할을 분담하며 동작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 적어도 칩 500개 이상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 특히 이 500개 칩은 단지 개인이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기기를 기준으로 잡은 것이고, 건물·도로·통신 등 사회 인프라에 녹아 공동으로 활용하고 있는 칩을 포함하면 1인당 하루 접하는 칩의 수는 수천 개에 이를 것을 추정된다.

펜티엄4 CPU 칩 하나에는 약 10만 ∼100만 개 이상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돼 있다. 일반 칩에도 최소 수만 개에서 수십만 개 트랜지스터가 활동한다. 따라서 칩 속의 수많은 트랜지스터가 범지구적인 외부 자극에 의해 30분만 동작을 멈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우리 생활 전반에 엄습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반도체 개척자인 닉 홀리니악 주니어는 “내가 장담컨대 트랜지스터가 한 시간만 작동을 멈춘다면 모든 생활은 중단되고 사회와 산업 기반은 수십 년 퇴보할 것”이라는 말로 칩의 중요성을 표현했다. 그만큼 칩은 우리 디지털생활에서 ‘물’과 ‘공기’ 만큼의 절대적 비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생활을 구성하는 칩의 개수가 무조건 늘어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을 보인다. 앞으로 PC와 휴대폰 등에 사용되는 칩의 수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칩의 고집적화를 염두에 둔 전망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디지털기기에 사용되는 칩의 수는 줄겠지만, 지금까지 아날로그 혼재 형으로 존재했던 자동차·냉장고 등에서 디지털화가 급진전돼 기존 소프트웨어·모듈 형태 부품이 칩화되면서 향후 탑재 칩 수는 급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즉 SoC 기술의 발달로 한 기능을 수행하는 칩의 수는 줄고 있지만, 또 다른 기능들이 칩으로 구현돼 우리는 당분간 칩의 홍수와 더불어 살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일반 자동차에는 150개 정도까지 칩이 들어가지만, 최근 개발되고 있는 하이브리드 카에는 적어도 300개 이상의 칩이 장착되고 있는 추세다.

반도체는 지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다. 이제 우리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그 속에는 반도체가 숨 쉬고 있다. 특히 생활의 편리함을 구하는 모든 제품에서 반도체는 그 위력을 발휘해 왔고 그 위력은 한층 커지고 있다. 인간의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세상엔 이런 칩도…" 쓰임새 따라 다양화

‘전자 공학에서 직접 회로를 붙이는 반도체의 작은 조각을 이르는 말’

국어사전에 나온 칩(chip)의 뜻이다. 하지만, 이제는 국어사전을 개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최근 국내 연구진이 간암의 재발률을 예측할 수 있는 DNA칩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간암의 재발과 관련 있는 유전자를 칩 위에 올린 후 수술받은 간암 환자의 암 조직과 반응시켜 환자의 재발 가능성과 시기를 예측한다.

DNA칩은 1994년 미국의 스티브 포터 박사가 생물체의 게놈에 빽빽이 들어있는 복잡한 정보를 한꺼번에 판독하기 위해 개발한 것인데 국내 연구진의 사례처럼 특정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파악한 후 이를 이용한 DNA칩을 만들어 질병 진단용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언뜻 시약이 떠오르는데 칩이라고 불리는 건 반도체처럼 유리나 플라스틱 위에 수많은 DNA를 집적시키기 때문이다. 단백질이 배열돼 있으면 단백질 칩이, 생체물질이라면 생체센서 칩이 되는 셈이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7월 자궁경부암 바이러스 진단용 DNA칩이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품목 허가를 받은 게 첫 상용화의 사례다.

DNA칩은 인간의 신체와 밀접하지만 적어도 몸에 넣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몸에 넣는 칩도 당국으로부터 시판 허가를 받았다. 미국 보안 전문 회사의 리차드 실리그(Richard Seelig)는 주사기로 주입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캡슐에 128자 길이의 식별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메모리와 데이터 전송을 위한 전자기 코일, 튜닝 콘덴서를 집어 넣은 ‘베리칩(VeriChip)’을 개발하고 지난해 10월 초 FDA의 승인을 받았다. 이 칩은 2004년 초 멕시코 법무장관이 자신을 포함한 160명의 관리들이 보안 대책의 일환으로 체내에 이식했다고 밝히면서 유명해졌는데 현재는 개인 식별 정보, 위치 정보 확인 정도의 수준이지만 유비쿼더스 환경과 맞물리면 칩 하나에 모든 생활을 의존할 수 있는 세상을 접하게 된다.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칩은 이식용 장기를 제어하거나 체내 혈당 등을 감지해 인슐린을 자동 분비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또 ‘삼키면 속을 훤히 볼 수 있는 캡슐 내시경’도 칩의 일종으로 이미 우리 생활에 바짝 다가선 상태다.

세상에는 이미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 다양한 칩들이 존재한다. 왠지 디지털 제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운동화에도 칩이 박힌다. 이는 우리나라 전자태그업체인 스피드 칩이 본격 사업화하고 있는 것으로, 운동화에 칩을 박아 마라톤 선수들의 주파기록을 정확하게 체크 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칩은 또 휴대폰 본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휴대폰 배터리 속에도 초소형 칩이 심어져 있다. 이 칩은 과충전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폭발 사고를 막는 역할을 한다.

화폐 위조 방지용 칩도 더 이상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일본에서는 일부 화랑에서 작가들의 창작품에 칩을 심어 둠으로써 위조품 출현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종종 일어나는 위조작품 논란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것이다. 또 시범운영 단계지만 일본 총무성은 앞을 못 보는 장애인들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지팡이 칩을 활용하고 있다. 도로에 센서 칩을 깔고 지팡이에도 이를 인지하는 칩을 박아 길잡이로 활용한다는 것.

아직은 일부지만 일본의 회전초밥 집에는 접시에도 칩이 박혀 있다. 회전초밥집은 벨트를 따라 초밥 1개를 담은 접시가 돌고 손님은 벨트 주위에 앉아 자신이 원하는 초밥을 선택해 먹을 수 있도록 돼 있다. 따라서 계산은 손님 앞에 남게 되는 접시 수로 파악한다. 그러나 접시에 센서 칩이 부착되면서 모든 계산이 원스톱으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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