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한국지사장의 자화상

 다국적IT기업 한국지사장들의 고민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시간은 벌써 마지막 분기로 내달음 치고 있지만 올해 매출목표 달성은 거의 물 건너가지 않았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더 갑갑한 것은 IT경기의 회복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IT경기는 내년 하반기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오고 있는 지금, 모든 것을 실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지사장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한국의 IT경기가 침체돼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본사에 읍소해 보지만 전세계를 대상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는 본사가 한국의 입장을 이해해 주리라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한국지사에 대한 지원이 축소되고 본사 내에서의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 또한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보고체제가 바뀌어 과거 아시아태평양지역 본부에서 이제는 중국이나 일본지사에 보고해야 하는 등의 수모를 겪고 있는 지사장이 한둘이 아니다. 비록 한정된 영역이겠지만 한국지사장에게 주어졌던 인사권이나 마케팅권한도 한국사람들의 손을 떠난 지 오래됐다. 본사의 철저한 실적관리는 한국지사를 단순한 영업조직으로 전락시켰다. 한국시장을 겨냥해 자발적으로 기획을 수립하고 이를 시행하는 살아있는 법인체로서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다. 이제는 프로젝트 입찰시마다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될 것인지에 대해 본사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또 매일같이 프로젝트 추진현황을 보고해야 한다. 이 같은 시스템의 전환에는 투명경영 구축이 전제돼 있기는 하지만 한국지사나 지사장의 역할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한편으로는 비록 한국시장의 매출은 떨어지고 있지만 실적이 부진한 만큼 본사에서 거두어가는 로열티나 이익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IT관계자들은 거의 없다. 본사와 지사의 계약조건을 과거보다 본사에 유리하게 변경해 한국지사는 힘들고 어려워도 본사는 자신의 몫을 다 챙길 것이 분명하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상황이 이처럼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국적기업의 R&D센터를 한국에 유치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 중국이나 인도에 투자하지 말고 한국에 투자하라고 권유할 만한 이유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갈수록 매력이 떨어지는 시장에 막대한 투자를 할 다국적기업은 없다.

 갈수록 사업이 힘들어지는 한국IT시장에서 다국적기업의 한국지사장들의 선택은 두 가지다. 본사의 압력을 수용하거나 아니면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무너져가는 한국지사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지사장을 교체해도 상황이 나아지면 좋겠지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히려 전임자보다 더욱 공격적인 영업으로 부작용만 키울 것이 분명하다. 전 세계적으로 IT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국 IT시장이 아직도 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은 과거 밀어내기식 영업에서 비롯된 엄청난 유통재고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다.

 강을 건널 때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지금 한국의 IT시장은 위기상황이고 전쟁상황이다. 단순히 사령탑을 교체한다고 해서 매출이 늘어나는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국적기업 스스로 어렵게 닦아놓은 한국시장에서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한국지사장들 스스로 위기를 타개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현재로써는 가장 좋은 위기타개책이다. 다국적IT기업 한국지사장들의 커가는 한숨소리에 한국IT산업의 현실을 접하는 것 같아 우울하기만한 요즘이다.

 양승욱부장@전자신문, sw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