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DTV 합의의 교훈

 정말 해괴한 합의문이다. 지상파DTV 전송방식을 놓고 정통부·방송위·KBS·언론노조가 최근 밝힌 합의문은 4년이나 지루하게 공방을 벌여온 이유가 뭔지 더 헷갈리게 만든다. 달라진 것은 DVB-H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문항 하나가 추가된 것뿐이다. ‘도입결정’도 아닌 ‘검토’를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 4년이나 걸렸다. 기술문제는 그 속성상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나오면 언제든지 채택을 검토해야 하는 사안이다. 굳이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원칙을 세우는 데 4년을 허비한 셈이다.

 하지만 당사자격인 4개 기관의 시각은 좀 다른 것 같다. 이들은 합의문을 통해 전송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관련 기술 및 산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부 정책을 결정했다고 자평했다. 무엇보다 합의 자체에 큰 의미를 뒀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대타협’내지 ‘아름다운 합의’라는 표현까지 썼다. 타협이나 합의에 익숙지 못한 우리나라 정서를 감안할 때 모처럼만의 합의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폄하할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본말이 바뀌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최소한 이번 합의의 본래 목적이 뭐였는지는 되짚어봐야 한다.애당초 대다수 국민의 바람은 시간과 비용을 추가로 들이지 않고 가능하면 이른 시기에 디지털방송을 시청하는 것이었다. DTV 전송방식이 미국식이든 유럽식이든 관심조차 없었다. 이를 엉뚱하게 이해관계의 잣대로 재단한 것은 그들이다. 기술적 담론보다 투쟁수단으로 이용한 것도 그들이다. 이제 와서 합의를 했으니 아무 상관없다는 식은 해도해도 너무 무책임하다.

 질질 끌어온 소모적 논쟁,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은 차치하더라도 산업적인 기회손실 비용이 너무 크다. 한발이라도 앞선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로 대국들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입장에서 지난 4년은 너무 아깝다. DTV 대기 수요만도 무려 4조원에 이른다는 한 시장조사기관의 자료는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경기침체의 주범인 내수부진의 돌파구를 눈앞에 두고도 엉뚱하게 헤맸다는 얘기다. 합의주체인 정통부·방송위·KBS·언론노조는 대부분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다. 국가경쟁력 제고를 최우선시해야 할 계층이 오히려 뒷다리를 잡은 셈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번 DTV전송방식 논쟁은 통방융합의 첫 단추다. 이를 잘못 끼우면 앞으로 벌어질 무수한 이견과 논쟁을 또 다시 소모적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 늦기 전에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반드시 짚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합의주체들이 지난 4년간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천착했고, 어떻게 말을 바꿔왔는지를 더 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번 합의가 정말 그들이 말한 대로 대타협이 되려면 선행돼야 할 것은 분명 있다. 바로 반성하는 자세다. 무엇보다 4년이 너무 아까웠다는 데 먼저 합의해야 한다. 논쟁의 잣대 또한 자기 이해관계나 밥그릇이 아닌 국가 경쟁력이어야 한다는 데 진심으로 합의해야 한다. 그것만이 그들이 말한 의미있는 아름다운 합의다.

 어찌됐든 이번 합의로 수도권을 비롯한 5대 광역시에서는 내달 열릴 아테네올림픽을 고선명(HD) TV로 즐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벌써부터 여운을 남긴 이동수신에서도 DTV 전송방식과 같은 논란이 되풀이될 기미가 보인다. 이미 지상파DMB를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고 이를 또 문제삼아 국익은 외면한 채 주체별 다툼이 재연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새삼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말이 와닿는 시점이다 .

김경묵부국장@전자신문, km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