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서정욱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이사장(3)

사진; 박정희 前대통령(가운데)이 1976년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했을 당시, 필자(왼쪽)가 개발품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3) 박정희 前대통령의 ‘번개사업’ 

1966년과 1970년에 KIST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각각 발족함으로써 한국의 과학기술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 산업기반 특히 방위산업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KIST는 연구를 주도하고 ADD는 개발을 주도하는 쌍두마차형 국방 연구개발 체제를 구상한 것 같다. 이러한 구상은 71년 말 ‘번개 사업’을 계기로 모습을 바꾸었다.

번개사업이란 1971년 11월 박 전 대통령이 ADD에 내린 긴급명령이다. 카빈 소총 10정, M1소총 자동화 MX 2정, 경기관총 M1919 A4 5정-M1919 A6 5정, 60mm 박격포 M19 4문, 81mm 박격포 M29 6문, 60mm 박격포 경량화 2문, 3.5인치 로켓포 M20 A1 2문-M20 B1 2문, 수류탄 MK2 300발, 대인지뢰 M18 A1 20발-대전차 지뢰 M15 20발을 연말까지 시제(試製)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청와대엔 방위산업 전담 수석비서실을 신설했다. 이것은 국가안보 위기에 탁상공론하는 과학기술자들과 무사안일한 관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ADD를 주역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번개사업에서 내가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수수방관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평소 생각하고 있던 분대용 무전기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이 무전기를 KPRC-6라 명명했으나 번개사업 품목이 아니니 연구비, 출장비, 야식비 같은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연구원들은 자비 국방을 하자며 열심히 따라 주었다.

아마추어 무선 출신 연구원들은 각자 집에 있는 무전기, 계측기, 부품, 야전침대 등을 연구실로 옮기는 등 KPRC-6 개발은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군용무전기는 전자기술만으로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금형기술, 절삭가공기술, 도금기술, 밀봉기술 등 온갖 기술이 동원된다. 군용 무전기는 전자제품으로 보다는 전자와 기계의 복합 시스템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도전은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물에 잠겨도 침수되지 않으며, 모래먼지 강풍에서 포장하지 않은 채 차량에 싣고 비포장도로를 달려도 끄떡없어야 했다. 또 섭씨 영하 40도, 영상 70도에서도 동작하는 야전 무전기를 한국 최초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기술이 없고 가난한 나라가 군용 통신장비물자를 개발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꼭 해야 한다면 규격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이에 대해 ‘오히려 가난한 나라일수록 더 견고하고 성능이 좋아야 한다. 부자 나라는 장비를 자주 교체하지만 가난한 나라는 오래 써야 하기 때문에 규격이 더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논리였다. 이 때문에 한국 실정에 너무 엄격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도와줘야 할 연구소들도 문제였다.

KPRC-6개발은 내 논리를 설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KPRC-6에는 한국이 소화할 수 있는 차세대 적정기술을 적용하기로 했다. 부품을 수입할 경우 우방들의 무전기와 공용하여 가격과 납기를 최적화하고, 민생용으로 겸용할 수 있고 수출이 가능한 품목은 국산화하기로 했다. 운용방식은 우방과 표준화하여 협동작전의 원활을 기하고, 생산은 복수 업체가 경쟁하도록 했다.

juseo@kit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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