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미국의 딜레마

 미국 보수 우경화의 종착점은 과연 어디일까. 9·11테러 이후 미국 행정부의 실세로 자리를 굳힌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지만 최근엔 국가안보 차원을 넘어 미국의 경쟁력 자체를 훼손하는 조치나 정책들이 잇따라 등장, 우려와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얼마 전 미국 과학학술단체들이 현행 비자발급 규정이 미국 과학기술 분야의 경쟁력을 저해하고 있다며 유학생 비자발급 제도의 개선을 촉구한 것은 어찌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최근 미 하원이 연례 국방 예산안을 담은 ‘국방 인증법(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을 통과시킨 것 역시 미국의 보수 우경화 경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국방인증법은 ‘군사적으로 민감한(Dual Use)’ 컴퓨터의 수출을 막는 초강력 규제 조치를 담고 있다. 소위 ‘섹션 1404’ 조항인 데 내용을 보면 가히 ‘슈퍼 1404조’라고 일컬을만 하다.

 이 규정에 따르면 미 컴퓨터 업체들은 650㎒급 펜티엄3 프로세서를 장착한 컴퓨터를 적성국가나 동맹국들에 수출할 경우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성능이 떨어지는 슈퍼 컴퓨터도 당연히 승인 대상이다. 그동안 컴퓨터 업체들은 19만M톱스(MTOPS:초당 백만번의 연산을 처리) 이하의 성능을 갖춘 컴퓨터에 대해 승인없이 수출할 수 있었으나 이 법안이 확정되면 1500M톱스 이하 제품만 정부 승인없이 팔 수 있다.

 사실 미국 정부는 지난 85년 IBM PC XT기종에 대한 수출 규제를 푼 후 수출 규제 완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클린턴 대통령 재임 초기인 지난 94년 1500M톱스였던 수출 규제 하한선이 2001년 8만5000M톱스로 높아졌으며 부시 행정부도 지난 2002년에 19만M톱스로 상향조정했다. 미 국방 관련 자료에 따르면 19만M톱스의 성능이면 국방 분야의 웬만한 솔루션은 98% 이상 처리할 수 있다. 2만M톱스만 되어도 핵무기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미국 정부가 군사적인 전용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IT의 기술 발전 속도에 맞춰 컴퓨터 수출 규제를 완화했다는 것은 M톱스의 규제 하한선이 계속 높아졌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번 법안은 역사의 시계추를 1994년으로 되돌리자는 것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최근 슈퍼 컴퓨터와 일반 컴퓨터간 경계선이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백개의 프로세서를 연결해 슈퍼 컴퓨터의 성능을 구현하는 클러스터링 기술의 등장은 슈퍼 컴퓨터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설령 미국이 군사적 전용을 우려해 슈퍼 컴퓨터의 수출을 규제하더라도 중국·러시아·인도 등 국가들은 얼마든지 슈퍼 컴퓨터를 스스로 만들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올해 ‘슈퍼컴퓨터 500’ 리스트에 따르면 중국은 500대 슈퍼컴 리스트에 5대의 자국산 컴퓨터를 올려 놓고 있다. 그 중 한 대는 성능면에서 세계 10위다. 러시아의 슈퍼 컴퓨터도 391위에 등재되어 있다.

 이 같은 여러 요인 때문에 컴퓨터 업계 종사자들은 이번 법안이 명백히 시대 착오적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논란이 확산되자 존 케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컴퓨터의 수출에 대해 포괄적으로 규제하기보다는 무기 체계 개발에 응용가능한 소프트웨어에 한해 기밀 품목에 포함시켜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문제는 대선의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이 법안은 상원과 협의 절차를 남겨놓고 있어 확정 여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이 법안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미국이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장길수 국제기획부장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