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바둑알로 부산에서 나오는 ‘기장(機張) 바둑돌’이 유명했다고 한다. 검정 돌은 읍의 십리포구에서, 흰 돌은 수영포구에서 나오는데 아이들이 주워 모은 돌을 돌확에다 갈아 바둑알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손톱은 하나같이 닳아 문드러져 있었다. 하지만 갈아대는 솜씨가 아무리 익숙한 아이일지라도 하루에 불과 수십알밖에 못 갈았다. 흑백 각 200알이 한 벌인데 관아에서 한해 나라에다 바치는 물량이 1000벌 이상이었다. 관아 아이들 20명이 달려들어 돌을 가는데 그것도 일정한 본 크기에 맞춰 순백색이 나게 갈아 빛과 모양을 갖추어야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쓰지 않고 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정조·순조 때 문인 심노숭(沈魯崇)이 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했을 때 목격한 것을 글로 옮긴 것으로 그의 문집 ‘산해필희(山海筆戱)’에 담겨 있다. 당시 문체반정(文體反正)시대의 중심에 서 있던, 소위 발칙한 신세대 글쟁이 심노숭은 이 글의 말미에 한양에 있는 사족들이 심심풀이로 즐기는 바둑놀이를 위해 아이들이 비생산적인 고생을 하고 있다고 일단의 소회를 적어 두고 있다. 그야말로 요즘 방글라데시 같은 최빈국의 아이들처럼 주먹밥 하나로 허기를 채우며 하루 종일 돌을 확에다 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측은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색깔 축에도 끼지 못하는 ‘흰 것’과 ‘검은 것’을 표식으로 삼아 유유자적 승부를 겨루는 사족들에 분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바둑을 ‘19로의 마술’이라고 찬양하고 또 누구는 우스갯소리로 기하학적 공간 인지 능력을 중시하는 게임이므로 바둑은 이공계 학문이라고 한다. 국제 기전 상금도 대단해 우승하면 거액을 움켜잡을 수 있으므로 개인이나 국가적으로 볼 때 부가가치가 높은 콘텐츠산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둑의 본질을 무엇보다도 흑백간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일 것이다. 한국바둑이 센 이유가 우리 전통바둑이 싸움을 위주로 하는 순장바둑이라는 데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뭔가 우리에겐 흑과 백, 즉 반대 개념에 대한 무의식적인 대결 의식을 왕성하게 자극하는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바둑 애호가들이 계가 승부보다는 필살의 묘수로 상대를 박살내는 속 시원한 불계승을 더 선호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바둑은 예로부터 수담(手談)이라고 했다. 흑 돌과 백 돌을 놓으며 상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도(道) 차원까지 승화시킨 고수들의 기보를 보면 흑백 간 대화를 하듯 아기자기한 조화를 이룬 것들이 많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 속에서 두어지는 바둑에서는 대화보다는 폭력이 난무하는 것 같다. 게시판이나 대화 창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인격 모독류의 멘트가 난무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숫제 입에 담기 어려운 상말로 리필을 달아 인터넷을 아예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몰상식은 정말 안타깝다.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저버린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더구나 정해진 룰을 악용해 상대방으로부터 승리를 훔치는 야바위 행위도 만연하고 있는 걸 보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아무리 익명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 익명성이 인간의 추악하고 오염된 양심까지 숨겨주지는 못한다. 이젠 정보시대에 걸맞게 네티즌의 의식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용범 논설위원 yb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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