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컴퓨팅유통의 위기

 다국적IT기업들은 한국내 영업을 위해 유통채널을 운영한다. 총판제체, 간접판매체제, 비지니스 파트너 제도 등 서로 말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개념이다. 우리나라와 구태여 비유하자면 유통 협력업체들이다. 그렇지만, 이들 유통채널들은 다국적 기업들의 제품에 자신들만의 노하우나 기술력을 얹어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점에서 단순 유통업체와는 일정 부분 다르다.

 대부분의 다국적IT기업들은 유통채널들을 통해 고객에게 자신의 시스템을 공급한다. 따라서 다국적기업 한국지사의 역할은 대부분 시스템의 강점을 알리는 마케팅과 유통채널들의 영업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채널정책이 큰 몫을 차지한다. 다국적기업과 유통채널들은 우리나라 대기업과 협력업체와의 사이만큼 뗄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다국적기업과 유통채널간 간격이 점차 벌어지고 있다. 벌어진 정도가 아니라 깨지고 아예 뒤돌아서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경쟁업체의 유통채널로 전환하는 기업들도 한둘이 아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이 컴퓨팅시장 전반에 확산되면서 중대형컴퓨터의 유통기반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감 마저 흘러 나오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의 원인 제공자는 다국적기업이다. 지난 2002년 이후 IT시장이 침체의 길로 접어들면서 충분히 예견됐던 사항이다. 경기가 회복됐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내부에 곪았던 종기들이 하나 둘 씩 터지기 시작한 것뿐이다.

 수요가 없으면 매출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적으로 평가받는 지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매출을 늘린다. 여기서 밀어내기가 시작된다. 실제 고객은 없지만 매출확대를 위해 유통채널들에게 일정량을 할당하는 것이다. 유통채널입장에서는 우선 기존보다 값싸게 시스템을 공급받을 수 있고 경기가 풀리면 그만큼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는 재고를 받아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전략적인 지원이 뒷받침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수요가 없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밀어내기는 유통채널들에는 엄청난 부담이다. 더구나 밀어내기를 받아주는 ‘전제조건’도 2003년부터 강화된 다국적기업들의 투명경영으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밀어내기로 인해 창고에 쌓인 기종을 신기종으로 교체해 주거나 하는 다양한 보상 프로그램이 중단됐다.

 다국적기업들은 경쟁력 강화라는 이유로 최근 대대적으로 유통망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속내는 재고를 어떻게든 정리하고 또 유통채널들 간 경쟁을 유도해 매출을 확대하려는 의도에 다름없다. 경쟁업체 간 경쟁이 아니라 같은 제품을 취급하는 유통채널간 경쟁이 더 치열하다. 여기에 지사 차원에서 특정 유통채널를 밀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면서 나머지 대부분 유통채널들은 심한 배신감 마저 토로하고 있다.

 유통채널들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외산시스템을 판매한다는 비난까지 감수하면서 한국시장을 개척해온 자신들에게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갑자기 내팽겨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다.

 유통기반이 흔들린다는 것은 그동안 다국적기업들이 수십년에 걸쳐 한국시장에서 쌓아왔던 공든 탑들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국적기업 한국지사들은 무엇보다 눈앞의 매출을 위해 유통채널에게 무제한의 경쟁을 요구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의 영업을 보장해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유통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며 한국내 비지니스를 성공시킬 수 있는 관건이다.

<양승욱 컴퓨터산업부장 swy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