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당시 가장 놀랍고 의아스러웠던 것은 미국인들의 ’일상’이었다.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에서 연수중이던 필자는 학교 인근의 골프장 풍경에 ’기겁’했고 동료 학생들의 거침 없는 언행에 ’질겁’했다. 아침부터 모든 매체가 테러의 참상을 전달하며 국가 위기 상황을 되풀이 경고하고 있었지만 골프장으로 향하는 차량은 꼬리를 물었다. 비록 테러가 발생한 뉴욕의 반대쪽 지역이지만 똑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이 ’기묘한(?) 현상’을 한국적인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직업적 호기심 탓에 이틑날에도 골프장을 주시했다. 상황은 여전했다. 미국인들은 일상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대통령이 테러 관련국가와 전쟁을 선포한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대답하는 학생도 수두룩했다. 그들은 이전까지만 해도 ’위대한 미국’에 대한 강한 자존심과 세계 평화를 역설했던 사람들이다. 테러를 분쇄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던 학생들이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인종과 계급갈등속에서도 보통 미국인들은 대단한 애국심을 과시했다. 차량에 국기 매다는 방법도 있었다. 슬픔을 나누는 모임도 많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지켜면서 제 자리에서 좀 더 치열하게 사는 것이 시련을 딛고 이겨내는 길이라 믿는다. "참전 거부"의사를 밝혔던 학생들도 "총 대신 연구에 몰두해 나라에 기여하겠다"고 당당히 말한다. 물론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애국심을 이용한 것이 이라크 전쟁이지만 그것은 정치적으로 교묘히 활용하고 ’오버’한 정치인들의 책임이다.
우리도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을 경험하고 있다. 국가 위기상황이 분명하다. 그러나 탄핵의 주체와 객체 모두 국민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 나라를 위한 결단이니 개혁을 위한 대의니 목청을 높이지만 당하는 것은 국민 뿐이다. 누구도 이같은 혼란과 불안을 초래하라고 국회에 혹은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한 적이 없다. 일은 벌어졌고 수습이 남았다. 아직도 정치권은 누가 옳은 지 사생결단이 한 창이지만 국민들은 애국심을 과시하고 있다. 기업은 기업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제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제 할 일 하고 있다. 전세계 지사에 이번 사태에 따른 후폭풍이 없도록 대책을 내려보내고 비상체제를 가동한다. 넘치는 수출 물량을 제 때 대기위해 생산현장은 24시간 풀가동 되고 있다. 예정된 외자 유치가 차질 없도록 전화와 이메일에 매달려 한국실정을 알린다. 엄혹한 IMF도 장롱속 금모으기로 이겨냈던 국민들이다.
그 덕분인 지 외국에서 오히려 불안심리를 걷어 내고 있다. 외국인들이 주식을 사들이면서 폭락했던 주가는 반등기미를 보인다. 치솟았던 환율도 다시 내려가고 있다. 약속한 외자유치가 무산됐다는 소식도 아직 없다. 오히려 한국산 반도체를 사재기하고 휴대폰 수출 오더를 늘리는 외국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투자 분석가들은 "한국의 펀더멘탈은 견고하다"며 "이번 충격에도 한국경제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란 보고서를 쏟아 내고 있다. 경제와 산업뿐이 아니다. 흥분과 욕설이 난무했던 사이버 공간도 차츰 냉정을 되찾고 있다. 분열과 갈등 보다는 위기 극복이 최우선 아젠다로 등장했다. 어려울수록 더욱 강해지는 한국인의 저력이 조기 안정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그래도 불씨는 남아 있고 불안하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하지만 침착하게 제 할 일 똑부러지게 해내는 국민들이 있다. 전방 초소에서 눈 부릅뜨고 경계서며 청춘을 맞바꾸는 젊은이들도 많다. 신발끈 고쳐 매고 정신 바짝 차리자. 위기는 곧 기회다.
<이택 편집국 부국장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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