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국의 IT산업을 이야기 할 때면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 한다.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해도 전혀 부담이 없을 정도로 우리들은 IT에서 만큼은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국적 IT기업들이 첨단시스템을 처음 공개하는 테스트 베드로 한국을 활용하는 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와 이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소비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IT시장은 규모 면에서는 세계 IT시장의 1%에 불과하지만 다국적기업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전략시장 중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지금부터 30여년 전부터 하나 둘씩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IT 기업들은 한편에서는 한국의 정보화를 이끌며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사업을 영위해 왔다. 그리고 이들의 성공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한국 지사의 피와 땀이 배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다국적 IT기업의 성공 스토리를 쓰게 한 주인공들인 한국 지사들이 요즘 들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책임만 주어질 뿐 권한이 없다. 과거에 본사가 한국지사에게 넘겨주었던 알량한 권한 마저 하나 둘씩 회수해가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 같은 현상은 올 들어 그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업계에서는 IBM의 납품비리사건이 빌미가 됐다고 전한다. 그동안 전략시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 지사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던 본사 입장에서 IBM사건은 본사의 입김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책임을 묻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한국IBM의 사장이 10여년 만에 외국인으로 바뀐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실제 지난해 부터 대부분의 다국적기업들이 한국에서의 마케팅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한국의 매니저들이 한국실정에 맞는 마케팅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영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심지어 매일같이 본사에 보고를 하고, 본사에서 지시를 받아 협상에 나서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다국적기업 측은 이 같은 상황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해명한다. 과거 한국시장에 특혜를 주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본사가 전 세계시장에 적용하는 기준을 한국에서도 적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경영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네 탓이오’라고 한국 지사에게 모든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취할 자세는 아니다. 한국 지사의 이사회에 대부분 본사 임원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본사 또한 책임소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지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화에 따른 결과다. 최근 본사의 지배력강화 움직임에 대한 한국 지사의 반발은 힘들게 키워 이제 안정적으로 사업을 전개할 만한 상황이 되니 본사가 직접 열매를 따려한다는 것이다. “불모지에서 내 방식으로 비즈니스를 키워놨더니 이제 와서 예외는 없으니 본사식으로 따르라는 주문에 자존심이 상해 그만뒀다” 라는 전 다국적 기업 지사장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다.
한국시장에서 성공 스토리를 이어가려면 한국지사의 위상을 강화하는 게 관건이다. 그렇지만 다국적IT기업들은 과거 10여년 전 처럼 지사의 권한을 축소하고 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한국 시장에서의 입지 또한 10여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다국적기업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양승욱 컴퓨터산업부장 swy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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