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3월 1일은 평생 잊을 수 없다. 7여년의 월급쟁이 생활을 끝내고 20평이 채 안 되는 사무실에서 3명의 직원과 함께 사업을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해 삼일절은 내게 경제적 독립을 위한 첫 날이었던 셈이다.
회사명은 코리아레디시스템으로 지었다. 코리아레디시스템은 당시 ‘버텍스‘라는 리얼타임 임베디드용 운용체계(OS)를 수입, 국내에 판매하는 일종의 오퍼상이었다. 버텍스는 웬만한 연구소의 개발자들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당시에도 생소한 OS였다. 이렇듯 내 사업의 시작은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기술적으로도 아주 특수한 분야였다.
넉넉하지 못한 자금, 게다가 그것마저도 부채로 시작된 사업은 창업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자금문제로 나를 압박해 왔다. 6년 동안 맞벌이를 하면서 모은 재산이라고는 고작 2000만원이 전부였다. 여기에 은행으로부터 차입한 3000만원을 보탰다. 급여와 사무실 유지비로 매월 500만원의 경비가 들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6개월이면 자본금이 거덜날 상황이었다.
지난 80년대 격동의 시대를 온 몸으로 부대껴온 경험한 운동권 출신의 감성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개척하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자본주의의 힘을 그때 깨달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또 왜 부자들이 그렇게 독한지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됐다.
다행히도 부채는 그 해 말 모두 갚게 됐지만 그 돈을 갚을 때까지 잠 못 이루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열정과 어려움도 나를 1년간 불면에 빠뜨린 적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은행 문턱이 무척 높았던 그 시절, 모 은행 지점장을 만났던 건 행운이었던 것 같다. 이 은행 지점장은 생소한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신용 대출로 3000만원의 창업자금을 대출해줬다. 꿈만 같았다. 그 때 창업의 기회가 주어졌기에 지금의 다산이 있고, 내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업을 시작하고 제품을 팔기 위해 영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난관은 또 버티고 있었다. 막상 우리의 제품을 살만한 고객이라곤 국산 전전자 교환기인 TDX-10을 개발하던 전자통신연구원과 삼성전자, LG전자 연구소 정도인데, 수천만원대의 고가 소프트웨어를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는 소프트웨어를 돈 주고 사는 풍조가 낯설었기에 우리는 왜 이 제품을 그들이 사야 하는지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몇몇 연구원들의 제안으로 관련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교육비를 받게 됐다. 이 교육비 덕분에 월 운영비의 절반을 해결할 수 있었고, 회사의 재정수명도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됐다.
몇 달 뒤, 몇 개월간의 교육과 발로 뛰는 영업이 결실을 맺어 전자통신 연구원에서부터 구매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오더를 받았을 때의 기분은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당시 연구원들과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같은 엔지니어로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이때 배우게 된 정보통신 관련 지식과 경험은 다산이 이후 독자적인 제품을 개발할 때 큰 밑거름이 됐다.
사업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생존이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창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움이 닥칠때 마다 좌절하지 않고 운명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매번 최선을 다했던 것이 지금의 다산을 만든 원동력이 됐다.
nam@da-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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