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탈 `레밍스 기업`

 90년대초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도스용 게임 ‘레밍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다. 북유럽이나 툰드라 지역에 서식하는 레밍스(일명:나그네쥐)의 습성에 착안해 개발된 게임인데 지금의 ‘리니지’나 ‘스타크래프트’ 못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몇년전에는 팜톱 등 PDA용 버전이 공개되면서 게임 마니아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레밍스는 흔히 특유의 집단적 습성 때문에 호기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놀라운 번식률을 자랑, 개체수가 어느 정도 이상 늘어나면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평소에 넘지 못하던 장애물에 도전하거나 덩치가 훨씬 큰 포식 동물들에게 덤비기도 하는 등 이상 행동을 한다. 급기야는 집단적으로 이동, 바다물에 뛰어들어 자살까지 감행한다. 아직 레밍스가 집단 자살이라는 극한 행동까지 불사하는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규명된 것은 없지만 개체수의 급격한 증가를 해소하고 생태계의 균형을 찾으려는 행위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이같은 레밍스의 이상 행동에 착안해 ‘디지털 레밍스(디지털 정보화 시대가 양산한 몰정체성의 추종주의적 인간형)’ ‘레밍스 효과(군중 심리에 휘둘리며 증시가 폭등 또는 공황에 빠지는 현상)’ 등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실 레밍스 현상은 인간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기업이나 경영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전설적 주식 투자자인 워렌 버펫은 일찍이 대다수 경영자나 기업들이 자신의 회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선도 기업이나 다른 경영자들의 전략·사업 방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우량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는게 절실하다고 일갈했다.

 그가 제시한 타파해야할 ‘관행’이란 가령 이런 것들이다. 회사의 영업 방침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 단지 회사의 여유 자금을 활용하기 위해 신규 프로젝트나 타회사를 인수·합병 하는 것, 최고 경영자들이 어떤 경영 전략을 제시하든간에 직원들이 예상수익률 등 경영 자료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행위, 선도 기업들의 신규 사업이나 타기업 매수 전략 등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행위 등 버펫은 회사가 파국으로 갈지도 모르는데 선도 기업들의 전략을 세심하게 검토하지 않고 추종하는 것이 마치 바다를 향해 뛰어드는 레밍스와 같다고 평가했다.

 현재 우리 기업에 진정 필요한 것도 결국 그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관행을 과감히 떨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관행을 깨는 것일까. 가령 최근 일본에서 부활하고 있는 일본식 경영 스타일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잃어버린 10년동안 일본에선 미국식 경영시스템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식되면서 종신 고용, 폐쇄적 기업 문화 등 기존의 일본식 경영 방식을 한낱 조롱거리로 전락시켰다.

 일본기업들은 다른 기업에 뒤질세라 사외 이사제, 감사 위원회 제도 등 미국식 경영 방식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관행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도요타·캐논 등 일본식 경영을 고수해왔던 기업들이 오히려 미국식 경영 스타일을 지향하는 기업보다 경영 성과가 우수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일본식 경영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지고있다. 반면 미국식 기준으로 볼때 기업 지배구조가 양호한 일본 기업들의 경영 실적이 오히려 부진했다. 물론 간과된 측면이 있겠지만 무조건 미국식 경영이 좋다는 기존의 관행은 최소한 일본에선 시험대에 올랐다.

 좀 다른 얘기지만 디스플레이 업체인 삼성SDI가 전통적인 IT사업부문인 CRT부문에서 예상밖의 좋은 실적을 내는 것도 일종의 관행을 깨는 행위로 보여진다. 많은 기업들이 CRT사업을 사양 산업으로 분류해 사업을 포기한 상황에서 어떻게 삼성SDI는 CRT부문을 캐시카우로 키워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시대를 보는 경영자와 기업들의 안목과 전략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앞으로 우리나라에 그런 기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장길수부장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