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와 같은 첨단업종을 ‘시간산업’이라고도 부른다. 10여년 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LA의 한 백화점 진열대 뒤켠에서 먼지만 뒤집어 쓴 채 외면당하고 있는 삼성전자 제품을 목도하고 참담함을 느낀다. 이런 2류 제품을 만들던 삼성전자를 10년 만에 세계 최고 기업 가운데 하나로 이끈게 바로 시간산업에 대한 이건희식 개념이다.
시간산업이라는 표현은 첨단업종 분야가 그만큼 기술변화가 빠르다는 의미일 터이다. 하지만 빠르다는 것을 단지 기술변화에만 국한짓는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서비스와 상품에 대한 이용자 습관이나 행동양식의 변화무쌍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엄청난 자금을 투입해 첨단기술을 개발하면 뭐하겠는가. 변화무쌍한 이용자의 성향에 맞추지 못하면 무용지물일 뿐인 것이다. 이것을 한발 앞서 읽어내고 의사결정을 내리자는 것이 이건희식 시간산업 개념이다.
그러니까 시간산업은 이용자의 변화무쌍함을 제품 설계에 능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요체가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이용자는 기업이 생산한 서비스나 상품을 무조건 수용하는 소비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이 그들의 성향을 설계단계부터 반영해야만 하는 고객의 입장에 올라서 있다. 월등한 기술력을 갖고도 ‘고객 읽기’에 실패한 대표 사례는 VCR표준 전쟁시 후발인 JVC에 패한 소니가 꼽힌다. 이런 사례들은 시간산업이 급부상한 90년대 이후에 부지기수로 나타난다.
IBM호환PC에 맥을 못춘 매킨토시컴퓨터, 윈도3.1에 밀려난 OS/2 등이 좋은 예다. 기능면에서 완벽했던 매킨토시는 시스템적으로 허점투성이였던 PC에 개방형과 호환성이라는 설계 컨셉트에서 졌다. OS/2는 성능과 기술에서 월등하게 앞서고도 PC에 친숙하지 못한 설계 때문에 윈도3.1에 나가 떨어졌다. 데스크톱PC와 휴대폰을 대체할 것으로 보였던 펜컴퓨터와 PDA도 기술에서 앞서고도 고객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당초 예상을 뒤엎고 TV가 PC를 흡수해가고 있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미국 PC시장 점유율 1위인 델이 디지털TV사업에 진출한 것은 차라리 극적이다.
‘고객읽기’ 성공사례는 이건희식 개념이 통한 삼성의 반도체사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 최강자로 올라선 TFT-LCD사업에서 삼성은 선발 일본기업들이 2세대에 몰두하는 동안 3세대를 택했다. 또 4세대가 표준일 때는 5세대를 치고 나갔다. D램 분야 1위로 뛰어오른 과정도 마찬가지다. 93년 일본 반도체업계가 6인치 웨이퍼에 집착하는 동안 삼성은 1조원의 리스크를 무릅쓰고 과감하게 8인치를 선택했다. 비용절감에 목말라하던 IT업계 전반의 요구에 부응한 이 선택은 삼성에게 마침내 D램업계 1위 고지 점령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줬다.
최근에 화두가 되고 있는 ‘고객읽기’ 경쟁의 하나는 무선인터넷과 휴대인터넷을 놓고 벌이는 수싸움이다. 가령 무선인터넷은 대용량 정보를 고속 처리할 수 있지만 이동중에는 ‘젬병’으로 돌변하는 단점을 갖고 있다. 반대로 휴대인터넷은 이동중 수신이 자유롭지만 당장은 무선인터넷의 장점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선인터넷은 이동성을 강화하고 휴대인터넷은 처리성능을 높이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이용자가 그때까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승패는 결국 어느 쪽이 이용자의 현재 심리를 더 파고드느냐에 달려 있다.
시간산업에 대한 경쟁력은 결국 기업이 이용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용자가 기업을 선택하는 문제다. 10대 분야가 모두 시간산업에 해당되는 차세대성장동력의 추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제 정부 기업할 것 없이 ‘고객읽기’에 투자해야 할 때다.
<서현진 디지털산업부장 jsu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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