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지천대감, 어디 계시나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왕조는 김성일과 황윤길을 왜에 보내 그곳 사정을 파악하게 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돌아와 아주 상반된 보고서를 올렸다. 한 사람은 왜의 기류가 심상치 않으니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관상학적으로 전쟁을 일으킬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주장했다. 정·부사로 파견된 두 인물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을 대표한 사람들이라,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나라의 존망이 달린 보고서를 내는 데도 반목하다가 종내 임진왜란이란 참상을 부른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입씨름으로 일관하던 디지털TV 방송 문제도 어쩌면 판에 박은 듯 똑같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미국식과 유럽식의 장단점을 살피고 돌아온 해외실사단이 해묵은 갈등으로 일본에서 계획했던 보고서 초안도 못만들고, 예정했던 공동 발표문도 취소됐다. 똑 같은 곳을 보고 왔는데 왜 말은 서로 다를까. 당시 동행 취재했던 어느 기자가 “이제 디지털TV 문제는 기술논쟁의 차원을 넘어 명분없는 정치싸움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듯이 간단히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정통부장관과 방송위원장이 교통정리에 나섰지만 결론 도출까지 상당한 갈등이 계속될거라는 게 일반의 시각이다. KBS의 디지털TV 비교시험과 관련한 입장 차이에서도 드러나듯이, ‘비교 시험평가’를 누가 주관하고 또 어떤 이들이 참석해서 기술평가를 하느냐에도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서로 못 믿어 하는 그런 눈빛을 지우고 ‘기술 평가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미국식과 유럽식의 장점만을 고집하며 타당성을 역설하는 양쪽의 이야기가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기술도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란의 핵심은 결국 ‘선택의 문제’로 귀착된다.

 산업계가 기회비용까지 합쳐 13조원을 투입한 상황에서, 정책 결정 지연은 산업계에 악영향을 미쳐 국가적으로 큰 손실을 줄 수밖에 없다. 하루가 삼 년 같은 디지털시대에 성장동력인 디지털TV를 놓고 벌이는 논쟁이 과연 생산적인지 의문이 든다.“경제에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미국의 전 재무장관 루빈의 말처럼, 국가정책 또한 예기치 못한 돌출변수나 상황 논리에 의해 공과가 달라질 수 있다. 유럽식을 선택하더라도 또 몇 년 후엔 디지털방송 기술이 어떻게 진화해 시장환경이 급변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통부나 방송위 모두 실타래처럼 얽힌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가슴을 열고 기존 정책을 완벽하게 보완할 수 있는 절충안을 찾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가령 고정수신은 미국식, 이동수신은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가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항복 문서를 만들자 척화파인 김상헌이 문서를 찢어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주화파인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이 찢어진 문서 조각을 주우면서 왜 화친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현실을 들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최명길은 “찢어서 버리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줍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裂之者可矣 拾之者可矣)”고 말했다. 최명길처럼 욕을 먹더라도 강력하게 소신대로 밀고 나가는 정책 추진이 아쉬운 때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법이다.

◆서용범 논설위원 yb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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