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번호이동에만 `올인`하나

 언론만 없으면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할만한 직업이다. 제도적으로 영원한 ’갑’의 위치에 있건만 언론이 끼어들어 감시하고 비판하니 성가실 따름이다. 박수 받고 격려 받을 일도 많은데 질책과 훈계가 더 잦으니 정서적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정통부도 통신사업자만 없다면 빛나는 부처이다. 모든 정책이 지원과 육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산업을 이끌고 벤처를 부흥시킨다. 국가 통신 인프라를 세계 초일류로 키웠다. 대부분 성공 신화로 점철되어 있다. 국민과 심지어 언론에까지 박수와 스포트라이트 받기에 바쁘다.

 하지만 통신사업자가 개입하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정책 방향이 옳은지부터 정부가 특정 이해당사자를 일방적으로 편든다는 볼멘소리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도무지 승복의 미덕이란 찾을 수 없다. 오로지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라는 잣대만 횡행한다. 덕분에 정통부가 규제의 칼을 휘두르며 권력의 산실 역할을 수행하던 통신사업자가 이제는 애물단지로 변했다.

 새해 벽두를 달구고 있는 번호이동성은 극명한 사례이다. 국민 편익을 위한 것인 지, 아니면 유효경쟁환경 조성 차원인 지 이제와 따지고 싶지 않다. 다만 예고된 정책을 시행하면서 터져 나오는 갖가지 잡음은 좀 더 세련되게 처리했어야 했다. 시행 첫날부터 모든 해당 사업자들이 "준비 부족"과 "경쟁사 발목 잡기"라며 비명을 지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번호이동성제는 IMT2000 사업자 선정 이후 가장 폭발력이 강한 핫 이슈다. 업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통부가 이 ’난장판’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시나리오별 시뮬레이션이라도 한번쯤 해보고 시행에 나섰어야 했다. 어차피 눈 뜨고 고객을 빼앗겨야 하는 사업자가 있는 한 매끄러운 일처리란 불가능이다. 철저한 준비와 명쾌한 기준을 만들고 엄격하게 관리 감독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통신시장에 관한한 참여정부의 정책기조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3강 정책이건 완전 자유경쟁이건 정책적 지향점을 밝힌적이 한번도 없다. 뚜렷한 정책컬러가 없으니 좋은말로 ‘전략적 모호성’이라 부른다. 국민들에게 가장 유리한 정책을 그때그때 시행한다는 ’공자님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 의지는 필요하다. 어떤 방향이 됐건 정부는 선택해야 한다. 불확실성에서 모든 갈등이 촉발된다. 국민도, 사업자도 방향이 보여야 헷갈리지 않고 갈 길을 가늠할 수 있다. 정치판 싸움에도 신물이 나는 판에 통신사업자간 이전투구까지 곱게 봐줄 국민은 없다. 지난 1년간 온갖 로드맵 만든다며, 기다려 달라던 정부였으니 이제부턴 ’행동’의 차례이다.

 번호이동성이 당장의 현안이지만 그에 못지 않은 과제도 산적해 있다. 정치 공방으로 변질된(?) DTV 전송방식은 여전히 해결기미가 없다. 산업계는 수조원을 투자하고, 일본은 본방송 시작하는데 우리는 입씨름으로 소일하고 있다. 정부 말 믿고 따르면 이익은 커녕 손해 본다는 주식시장의 ’격언’이 정보통신에도 상식이 되고 있다. 중국 특수로 수십개가 넘는 업체들이 생겨 났지만 거품이 꺼지며 벼랑끝에 선 단말기업계도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 대표산업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지만 누구 하나 찬찬히 들여다 보고 대안의 깃발을 드는 정부부처가 없다. 한 때 정책 트레이드 마크였던 벤쳐는 벌써 잊혀진 채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개각이다 총선이다해서 당분간 정책 혼선은 가중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 이끌고 묵묵히 할 일 하는 집단은 관료들이다. 새해에는 모호성 걷어 치우고 당당하게 정책을 제시하는 정부의 모습이 보고 싶다. 책임의 뒤에 숨지말고 앞으로 나서란 말이다.

 <이택 편집부국장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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