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제조업의 부활로 10여년간의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 중국은 제조업으로 성장의 날개를 달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만 경기 침체가 거듭되는 가운데 그나마 버팀목이었던 제조업까지 위기에 내몰렸다. 2003년말 한중일 3국 제조업의 현주소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제조업 위기론이 고조됐다. 이를 경고하는 경제연구소의 연구논문이 잇따르며, 제조업 활성화를 위한 민관 합동 회의나 세미나가 최근 부쩍 잦아졌다.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IT제조업 분야는 하반기 들어 호조세다. 수출 목표 150억 달러는 7억달러 이상 초과달성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그런데도 제조업 위기론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제조업 강국 일본과 신흥 강국 중국 사이에 끼어있다는 위기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 더 이상 제조업울 못하겠다”는 인식의 확산도 한몫을 하고있다.
국내 제조업과 수출의 간판 주자인 삼성전자만 해도 그렇다. 이 회사는 화성 반도체 공장의 차세대 라인 확보를 위해 연내 부지를 마련하려 했으나 수도권공장총량제 등 현행 제도론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더 이상 늦어지면 중국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부처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신성장동력 찾기 작업도 중소 제조업체들에겐 먼 얘기다. 내수 침체와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에 지친 기업들에게 5년, 10년 후의 미래가 무척 현실성 없이 보인다. 한 TV부품업체 임원은 “정부가 디지털TV를 차세대 성장동력 품목으로 선정했던데 당장 특소세만이라도 없애면 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국내 제조업 업그레이드는 무엇보다 정책적인 지원체계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산업계 안팎에서 높다.
세계무역체제(WTO) 아래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효과적인 지원책은 바로 연구개발 프로젝트 지원이다.
정부는 과제마다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지원해 핵심 부품 등의 개발 자금으로 지원한다. 하지만 과제 선정시 시장성과 기술 경쟁력에 대한 분석이 미흡해 헛돈만 쓰는 사례도 적잖다. 어렵사리 개발에 성공하고도 시장 예측이 빗나가 상용화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는 최근 5년간 부품 개발을 위해 국책연구기관과 산업계에 3500억원을 투입했으나 기술료 수입은 9억원(회수율 2.8%)에 불과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민간 중심의 차세대 성장동력 프로젝트 기획과 연구개발 지원 프로그램을 기획중이다. 특히 생산중심형의 제조업을 기술집약형 산업으로 고도화하기 위해 제조업 클러스트 구축과 IT를 활용한 제조 기술 향상(e매뉴팩처링) 등의 다양한 방안을 마련중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단계로 기업의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한다. 금형에서 ‘e매뉴팩처링’에 이르기까지 제조업 인프라 구축 작업도 지난한 과제다.
한 대기업 부품업체 관계자는 “이러한 작업이 다 마무리되려먼 적어도 몇년은 더 걸릴텐데 그 때까지 경쟁력 있게 살아남을 제조업체들이 국내에 몇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래도 서둘러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
일본 제조업이 그랬다. 일본 제조업은 10여년의 불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술개발 투자를 확대했다. 기술혁신 시스템을 개혁해 왔다. 그 결과가 최근의 일본 제조업 부활로 나타났다. 물론 일본은 탄탄한 기초기술과 공정기술을 보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에 비해 기술 수준이 다소 낮다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일부 공정기술에선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어 일본처럼 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우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국제 가격경쟁 심화와 중국의 생산기지화로 국내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사실이나 너무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만을 생각해선 안된다”며 “기술개발을 통해 경쟁력 확보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거와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서 우리 경제의 기반이 될 제조업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정부 정책도 이러한 믿음을 확고히하는 쪽으로 잡아야 한다.
신국환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한국경제의 성장은 남다른 기업가정신과 국민의 합심된 노력, 정부의 뒷받침이 조화돼 반도체,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등 세계수준의 실물경제 기반을 구축한 데서 이루어졌다”며 “21세기 처음으로 선진국에 도전하는 한국경제는 강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혁신주도형 성장전략과 한국형 선진화모델 개발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정책 방향은 이미 나와 있다. 우리 제조업은 완제품 조립에선 중국은 물론 일본에도 앞서나 핵심 부품과 신소재, 모듈 부품 등에서 취약하다. 이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면 승산이 있다. 산자부와 과기부는 물론 정통부까지 IT핵심 부품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은 이 점에서 바람직하다. 다만 금형과 같이 제조업의 기본 분야이면서 IT기술로는 대접받지 못하는 분야가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연구개발 지원 못지 않게 제조업 경영 인프라 개선도 시급한 과제다. 오히려 상당수 제조업체들은 이를 더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수도권 공장 총량제 탄력 운영이라든지 내수 시장 활성화를 위한 특소세 인하 등은 제조기술과 무관한 것이다. 또 ‘e매뉴팩처링’을 활성화하기 위한 제조업 정보화 지원은 날로 중요성이 더해간다.
김홍경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은 “중소기업의 정보화·IT화는 국가산업의 기초이자 토대여서 정부차원의 육성이 필요하다”며 “중소 제조업 기업들이 정보화를 통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게 기반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칠두 산업자원부 차관은 “e매뉴팩처링·중소기업IT화·4대지역정보화사업 등 전통제조업의 IT화를 촉진하기 위한 정부 정책은 제조업 진화의 방향과 한국적 특성을 조화시켜 나가는 작업”이라며 “특히 우리나라 제조업의 공동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아 경쟁력있는 기업과 산업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제조업의 업그레이드는 우리 산업과 경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거기에 미래가 있다.
<특별기획팀>
◆ 중소 제조업체들의 목소리
삼성·LG 등 대형 완제품 업체의 해외 설비이전 가속화로 국내에 거점을 둔 협력업체의 수주 물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에프에스티 장명식 사장은 “대기업들이 마케팅 전략을 현지화에 초점을 두면서 거래처들이 사라져 수주 물량이 줄어들고 있다”며 이를 보완할 정책 마련을 요구했다.
인력 수급 해소에 대한 요구도 있다. 2차전지 팩업체인 이랜텍 이세용 사장은 “중소업체들은 상대적으로 대기업에 비해 우수 연구 인력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면서 “그마나 병역특례제도를 통해 우수 인력을 유치해온 만큼 이 제도를 축소하기 보단 더욱 활성화해야한다”고 말했다.
LCD TV·MP3플레이어 업체인 덱트론 이영홍 기획실장도 “해외시장 개척에 대한 정부 지원은 상당한 수준이나 중소기업 기술 인력에 대한 지원은 미흡하다”며 “우수한 인재들이 중소기업에서 오래 일할 수 있게 정부 차원의 재교육시스템에 관한 지원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삼성전기 이상표 팀장은 “IT산업 강국으로 가기 위해선 완제품의 알맹이인 부품 기술력과 경쟁력 강화가 선행되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정부가 직접 나서서 부품업체의 제품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등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품소재통합연구단 이덕근 소장은 “중소업체가 아무리 우수한 부품을 만들더라도 세트업체가 신뢰성을 이유로 들어 채택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 제조업 재도약은 영원한 숙제에 불과하다”며 “정부 차원에서 세트업체 임원과 부품업체 사장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장을 마련, 품질 등의 측면에서 서로 눈높이를 맞추고 이를 통해 세트업체 고위 임원들이 현장 실무자들에게 신개발 국산품 채택을 독려해야만 결국엔 세트업체와 부품업체가 윈윈할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쭈저우에 섀도마스크 공장을 두고 있는 LG마이크론의 조영환 사장은 “중국에서는 투자 유치를 위해 각종 세제 해택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며 “중국으로의 공장 이전이 당연한 수순인만큼 국내 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하는 데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 사장은 구체적으로 “고부가 제품을 세트업체와 공동개발 할 수 있도록 정부가 환경을 조성해야한다”고 덧붙였다.
◆ 인터뷰 - 성윤모 산자부 자본재통상팀장
“제조업은 이제 이익창출의 중점을 생산·조립부문에서 부품·콘텐츠 부문과 R&D·마케팅 부문으로 옮겨야 하며, IT의 기반화, 지식의 자본화, 핵심역량을 통한 고도화·융합화·네트워트화라는 미래 제조업의 모습을 구체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윤모 산자부 자본재통상팀장(41)은 “정보혁명시대는 제조업에게 몰락이라는 위기와 제조업의 도약이라는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성 팀장은 최근 ‘한국의 제조업 미래가 두렵다’는 저서를 발간해 제조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 변화가 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성 팀장은 산자부에서 산업관련 부서를 두루 돌면서 ‘제조업’이라는 화두를 놓고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특히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의 도래로 한국경제 발전에 있어서 제조업의 역할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제조업의 진정한 모습 찾기가 한국경제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체성 찾기라는 생각으로 제조업을 연구해 왔다.
“‘한국의 제조업은 미래가 두렵다’라는 책은 바로 10년 이상을 붙들어 온 제 화두에 대한 대답이자 2년간 일본 파견생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팀장은 일본 전자상거래추진협의회(ECOM) 파견과 일본 게이오대학 비즈니스스쿨 수학을 통해 세계 최강 일본 제조업의 모습과 정보혁명의 실체를 직접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일본 경제가 10년 이상의 불황을 겪으면서 경제대국을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일본 제조업의 힘”이라면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나노기술 등 미래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고 말햇다.
성 팀장은 그렇지만 우리의 막강한 IT인프라와 전통제조업의 만남이 연출할 신화를 기대한다.
“우리 제조업이 디지털 경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기로에 섰으나 21세기 제조업으로 성공적으로 진화해 ‘한국 제조업은 영원하다’는 신화를 실현시켜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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