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화섬업계에 거는 기대

 “부품·소재야말로 알짜배깁니다. 특성상 독과점사업이에요. 무어의 법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들 첨단 IT분야에 눈독을 들이고 있지만 그곳은 무한경쟁의 장입니다. 하지만 부품·소재는 경쟁이 매우 제한적입니다.”

 한 부품업계 사장의 자조섞인 독백이다. 그는 국내 기업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눈앞에 놓고도 디지털에만 눈이 멀었다며 씁쓸해했다. 그의 지적은 얼마가지 않아 적중했다.

 “부품소재산업을 맡아줄 데가 마땅치 않습니다. 고민입니다.” 부품·소재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인 한 공무원의 푸념이었다. 요지는 이렇다. 중소기업들이 너무나 열악한 처지에 있어 지원하고 육성하기에는 시간도 돈도 부족하다. 결과도 불투명하다. 그렇다고 세트산업을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들이 대신 맡아주길 바랄 수도 없다. 대기업들의 여력도 문제거니와 중소업계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도대체 대상이 있어야 지원도 하고 육성도 할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국내 부품산업의 현주소는 말이 아니다. 대부분이 세트업체의 1, 2차 협력사 정도의 중소기업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들은 대규모 설비투자나 R&D는 꿈도 못꾼다. 그저 세트업체의 필요성에 따라,안정적인 수급을 위한 배려에 의해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에겐 해외시장 개척이나 글로벌 경쟁력 확보라는 말은 남의 일처럼 들릴 뿐이다. 내일이라도 협력사에서 탈락하면 살길이 막막해진다. 당장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소재분야는 더하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가 주력수출폼목으로 자리잡았지만 소재는 여전히 대외의존적이다. LCD 핵심소재의 국산화율은 30% 정도다. 수입유발효과가 90%라는 반도체는 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소재 국산화율은 30% 미만이다.

 정부는 지난 2001년 ‘MCT2010’이라는 원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2010년까지 부품·소재를 주력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세트산업이 중국에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설득력있는 대안이 아닐 수 없다. 부품·소재분야는 세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진국형이어서 중국의 추격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감안됐다. 특히 대부분 수입해서 쓰고 있는 부품·소재를 국산화할 경우 그 부가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1년에 50개씩 10년간 500개의 일류 부품소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이같은 현실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한일FTA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가뜩이나 대일 의존도가 심한 부품과 소재분야는 치명적이다. 부품소재의 육성은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당시 누가 이 중차대한 역할을 누가 맡아줄 것인지를 두고 많은 얘기가 오갔다. 결론은 화학섬유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중견그룹들이었다. 기술력에서나 덩치에서나,산업의 연관성에서 가장 적합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최근 제일모직, SKC, 코오롱, 효성 등등 굴지의 화섬업계가 앞다투어 소재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아예 주력업종을 전환하겠다는 곳도 있다. 국내에만도 드넓은 시장이 있는 정보전자 소재산업은 원천이 되는 화학기술이 있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발등의 불인 소재산업을 일구어줄 마땅한 주체들이 적기에 나타났다는 점은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화섬업계는 돈벌이에 안주했던 나머지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소홀히 했다. 밀라노프로젝트로 중흥을 꿈꾸었으나 여의치 않다. 이미 해외에서 꿈의 신섬유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요즘 정보전자 소재산업은 이들에게 마지막 승부수다.

 부품왕국 일본은 소재산업이 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막강하다. 부품산업의 힘도 따지고 보면 소재에서 비롯됐다. 소재산업을 발판으로 화섬업계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해본다.

 <유성호 디지털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