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 근처 예성강은 송상(개성상인)을 낳은 젖줄기였다. 송악의 신흥 귀족 출신인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후 중국의 송나라, 아라비아의 다지국(大食國), 그리고 왜국(일본)과의 무역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예성항) 덕택이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우벽란정에 왕의 명을 적은 조서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선 사신이 도착하거나 떠날 때 반드시 하루씩 묵을 수 있도록 했다.
왕조가 바뀌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개성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벼슬을 꺼리는 대신 상술 개발에 전념해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섰다는 복식부기(四介松都置簿法)를 만들었다. 조선왕조가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하고 한양의 상인들이 관수품과 무역상품의 조달권을 장악하자 개성상인들은 전국의 상업계를 연결하는 행상조직을 형성해 그 기반을 더욱 확고히 다지기도 했다.
이후에는 전국의 주요 상업중심지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 전국의 포목상권을 장악했으며 양태를 매점해 직접 판매하는 도고(都賈)상업을 통해 상업자본을 축적했다. 개성상인들은 또 시야를 국외로 넓혀 피혁·지물 등을 매점해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에서는 바늘·모자·마총 등을 수입했다. 인삼도 재배 전 단계에서 선매해 이를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는 은을 들여와 다시 중국에 수출하는 식의 상술을 발휘했다. 이를 통해 송상은 국내 최대의 토착민간자본으로 성장, 개항 후에는 외국 자본에 큰 타격을 입혔다.
엊그제 240여명의 중소기업인이 판문점을 통해 하루 만에 다녀온 개성공단은 예성강을 끼고 있는 곳이다. 아직 산업기반시설이 취약하고 핵문제를 비롯한 대내외적 위험요소가 많지만 개성공단 입주를 희망하는 중소기업들이 1단계 수용계획의 4배(1200여개사)에 달하는 것을 보면 송상의 후예가 되살아나는 듯하다. 언젠가 우리 중소기업들이 개성공단에 입주하면 송상의 정기를 이어받아 근면과 성실, 그리고 높은 상술을 발휘하기를 기대해본다.
◆ 이윤재 논설위원 yj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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