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기술인력들이 우리나라를 떠나고 있다.
기업 내부의 정형화된 조직구조, 비합리적인 인사정책, 45세 정년 풍토 등이 핵심 기술인력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
특히 벤처투자 악화로 창업의 기회조차 마련할 수 없는 엔지니어들이 중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에 우후죽순 생겨나는 신설 제조업체나 미국·유럽 등지의 경쟁사로 재취업하면서 IT한국의 위상을 위협할 수 있는 새로운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휴가철 해외 면접 다니는 엔지니어들=여름 휴가가 절정에 다다른 이달초 말레이시아행 대한항공 기내.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자 서너명이 사뭇 긴장된 모습으로 앉아 있다. 하이닉스반도체에 근무한다는 이들은 여름 휴가를 이용해 말레이시아의 신생 반도체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몇년째 동결된 임금에 엔지니어로서의 사기가 떨어져 있는 터에 외국회사에서 좋은 조건을 내걸며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는 것. 이 중 한 엔지니어는 “면접에 필요한 항공편 숙식까지 해당 회사에서 일체 부담하겠다고해 동료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서 “이미 나가있는 동료들도 많아 조건만 맞으면 응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같은 상황은 비단 하이닉스뿐만 아니다. 90년대 후반 벤처 붐이 불면서 창업의 길에 나섰던 대기업 출신의 엔지니어 중 상당수가 최근 벤처가 어려워지면서 해외로 재취업했다. 기존에 근무하던 대기업으로는 돌아가기가 어려운 반면, 중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의 신생 반도체업체들은 파격적 대우로 이들을 끌어가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거절할리가 만무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엔지니어에겐 미래가 없다?=엔지니어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데는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 기업의 엔지니어들에게는 40대 중반 이후의 비전이 없다는 것.
삼성전자 개발팀장 출신 한 벤처기업 사장은 “수만명에 달하는 엔지니어들이 사업부별로 포진해 있지만 사업부장이나 사장 외에 45세 이후에 엔지니어가 남아서 할 일이 별로 없다”면서 “40대 중반이 되기 전에 창업을 해 나가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사장처럼 성공을 거두면 벤처기업 사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지만 대다수 엔지니어는 경영노하우의 부족으로 창업에도 실패를 보게돼 손쉽게 해외 재취업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반면 우리 인력을 끌어가는 경쟁사들은 좋은 급여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로서도 장기적으로 개발업무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별도의 인센티브나 펠로십 제도 등을 제시하기 때문에 귀가 더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인력난에 허덕이는 기업들=문제는 숙련된 인력들이 빠져나간 중견·중소기업들은 제품개발이 중단되는 등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또 비교적 인력풀이 넉넉한 대기업들도 핵심 엔지니어가 부족해 허덕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석박사급 이상의 해외 우수기술을 스카우트해 오는 임원들에게 머리수와 퀄리티당 별도의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등 특별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 큰 심각성은 인력을 빼간 경쟁사들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데 이들을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례로 하이닉스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상당수 마이크론과 인피니온으로 건너가 DDR SD램 개발 및 공정 안정화에 투입됐고 중국 SMIC와 말레이시아 실테라 등은 삼성전자·동부전자·아남반도체 출신의 한국 인력들을 데려가 초기 라인구성 작업을 맡기기도 했다.
포항공대 정진용 교수는 “정부와 대학이 나서 이공계 육성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 엔지니어들이 기업내부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공염불이 되기 쉽다”면서 “엔지니어가 연구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경영자의 마인드가 바뀌고 인사·조직제도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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