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편지](29)가부토초의 늑대

 지난 줄거리

 아키라의 두번째 청부살인의 가능성이 JTT 민영화와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에이지는 도쿄대 교수 히하라와의 전화를 통해 가부토초의 늑대라는 인물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된다.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현재의 도쿄인 에도를 일본의 중심으로 하며 큰 성을 짓는다. 바로 현재의 황궁인 에도성이다. 지방 각성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공사에 총동원됨은 물론이다. 이때 도쿠가와 가문과 가까이 지내며 에도성 부근에 큰 저택을 가지고 있던 다이묘가 있었으니 마키노라는 자였다. 마키노는 저택 안에 큰 신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사들의 갑옷, 즉 가부토를 모시는 신사여서 가부토신사라 하였다.

 세계 3대 증권거래소인 도쿄증권거래소가 자리잡은 가부토초는 이 신사가 있던 자리다. 명치유신이 일어나고 10년이 지난 1878년 일본 최대의 장사꾼이자 미쓰이재벌의 지도자 시부사와 에이치가 주동이 되어 설립된 도쿄증권거래소는 봉건제도를 정리하기 위해 발행된 공채의 거래를 위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가부토초의 전성기는 아마 1920년대였을 것이다. 당시 다이쇼(大正)시대는 소위 다이쇼 민주주주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고 증권투자도 활발하였다. 일본역사를 통틀어 증권을 중심으로 하는 직접금융이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간접금융을 압도한 유일한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부가 아시아침략을 기도하는 1930년대 이후 금융은 자금 동원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증권은 은행의 부수적인 존재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가부토초에는 활기가 넘친다. 이유는 증권회사가 번성해서라기보다 이 동네에 일본을 대표하는 미쓰코시, 다카시마야 등의 백화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상업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니혼바시(日本橋) 부근의 식당들에는 성질 급한 증권맨들과 까다로운 쇼핑객 주부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빠르게 내는 곳이 많다.

 증권경제연구소에서 신문을 훑어보던 에이지와 히로코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입구는 좁으나 안은 넓고 시원하다. 사바(고등어)정식을 시켜놓고 안을 훑어보니 종업원 외에 주인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에이프런을 두르고 홀내에서 일을 하고 있다. 둘다 80은 넘어 보인다. 노부부가 에이지의 식탁으로 음식을 날라오는데 표정이 심각하기가 경건해 보일 정도다. 음식을 내려놓는 노인에게 에이지가 사근사근하게 말을 건다.

 “이타다키마스.”(잘 먹겠습니다)

 “도조 고 윳그리.”(천천히 잘 드세요)

 “주인어른 이 곳에서 오래 장사하신 것 같네요.”

 “선친에게서 이 가게를 물려받은 것이 내 나이 스물넷 때이니까 60년 되었네요. 중일전쟁이 터지고 난 1939년이었지.”

 “그러면 가부토초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글쎄 거기까지는 안 가도 꽤 안다고 봐야지요.”

 “주식투자는 많이 하셨어요?”

 “웬걸… 나는 바쿠치(노름)를 싫어해서 별로 안했어요.” 일본의 서민들에게 주식투자는 아직 노름으로 통하는 것이다.

 “혹시 이 동네에 주식바쿠치 잘하기로 소문난 가부토초의 늑대라는 사람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가부토초의 늑대? 대단한 별명이네.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미쓰코시 백화점 뒤로 돌아가면 백양사라고 작은 세탁소가 있는데 거기 마부치라는 늙은이가 이 동네 토박이이고 워낙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서 알지 모르지.”

 “감사합니다.”

 미쓰코시백화점 앞을 지나가는데 히로코가 팔을 당긴다.

 “우리 당신 와이셔츠나 한 두어 벌 사가지고 갑시다.”

 “아니 세탁소에 마부치 노인을 찾아가는데 와이셔츠는 왜 사?”

 “그 사람도 뭔가 일을 주면서 말을 붙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의심할 수도 있잖아요. 새 와이셔츠는 딱딱해서 못 입는 버릇이 있어 한번 세탁을 맡긴다고 둘러대자고요.”

 “그거 명안인데. 히로코는 역시 나의 영원한 파트너야.”

 “아첨하지 마세요.”

 백양사에 들어서니 현대적 건물 사이에 이런 구식 세탁소가 있나 할 정도로 오래된 세탁소에 옷이 빽빽이 걸려 있어 안이 잘 안보인다. 문소리를 듣고 나온 점원은 머리를 오렌지로 물들인 젊은 여자다.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천천히 새 와이셔츠의 포장을 풀며 에이지가 물어본다.

 “야… 여기 참 오랜 만이네요. 내가 한 이십년 전에 이 근처에 근무하며 가끔 옷을 맡겼는데 그 모습 그대로네요. 마부치상은 지금도 건강하시죠?”

 “네. 고맙습니다. 아빠는 지금도 틈만 나면 피칭코에 가세요. 아마 곧 돌아오실 거예요.”

 “다행이네요. 아직 건재하시네요.” 하는데 뒤에서 기척이 나며 노인이 한 사람 들어오는데 하도 작고 말라 건강상태를 알 수 없을 정도다. 이래서 외국인들이 일본인을 왜인이라 하는구나 실감이 든다. 몸은 바싹 마르고 머리칼은 은빛으로 빛나 마치 굵은 멸치를 말려 놓은 것 같다.

 “마부치상이지요?”

 “누구시더라?”

 “아, 네. 저는 한 이십년 전에 가부토초에 근무하며 여기서 자주 뵌 적이 있습니다.”

 “이십년 전이라면 가부토초가 경기 좋던 시절인데 어디 증권회사에 근무하셨나?”

 “저는 지방은행의 도쿄지사에 근무하며 증권거래소에 들락거리곤 했지요. 아무튼 여전히 건강하시니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마부치는 한결 경계심을 늦추며 에이지의 관심에 고마움을 보인다.

 “그런데 마부치상, 당시 이름이 있던 가부토초의 늑대라는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을 어떻게 아시나? 그 사람 아는 이는 많지 않은데?”

 “아, 네. 우리 은행장이 가끔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제 뇌리 속에서 일종의 전설로 남아 있지요.”

 “전설이라…. 그 사람 그렇게 전설이 될 만한 훌륭한 인간은 아니지. 워낙에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 나도 잘 몰라. 일본을 흔들던 다나카 수상의 비서실에 있다가 금융업에 나섰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람 아마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지….”

 “사라져요? 죽었다는 말씀입니까?”

 “이 동네에서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게 언제쯤인데요?”

 “글쎄. 버블경제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니까 쇼와 60년(1985년)은 지나서일 거야.”

 “아니 멀쩡하던 사람이 왜 사라진다는 겁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 사람이 외제차를 좋아했는데 그 사람이 타던 차와 사람이 함께 없어졌다고 당시 기바(木場)에 있던 외제차 수입회사에 경찰이 조사를 하고 하던 소동이 있었지 아마.”

 “그 사람 이름이 이노우에였지요?”

 “그래 맞아. 이노우에. 그런데 그 사람에 관심이 아주 많구먼.”

 에이지는 순간 긴장하여 머뭇거린다. 이때 히로코가 나선다.

 “사실은 이 사람 지분시(自分史)를 쓰고 있거든요.”

 지분시란 자신의 일생을 역사책으로 엮어 출판사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책으로 만드는 일이다.

 “아 그런 게 있다더군. 나 같은 늙은이야 이야기로 쓸 인생 이야기도 별로 없지먼.”

 “그래서 그 지분시를 쓰는데 과거를 돌이켜 보며 분명하지 않은 것은 좀 확인을 하고 다니는 중이에요.”

 “아 그래요. 좋은 오쿠상(부인)을 두었구먼. 우리 마누라는 나를 두고 간 지 벌써 10년이 넘어.”

 인사를 하고 세탁소를 막 나서려는데 노인이 따라 나오며 말을 붙인다.

 “증권신문사에 요네쿠라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동네 수십년 근무하며 내 술 친구가 되었지. 수년전에 은퇴하였는데 아직도 기억은 생생할 거야. 그 사람이라면 알 것 같은데.”

 “그래요? 혹시 연락처는 모르시죠?”

 “증권신문사에 가면 알 수가 있을 거야. 바로 저기 길 건너인데.”

 증권신문사가 있는 층으로 올라가니 안내데스크에 아무도 없다. 내선번호를 돌리라는 안내를 보고 총무로 전화를 돌린다. 여자가 나와 곧 나가겠다는 말을 하고 끊는다.

 유리문을 밀고 나온 여자는 50이 훨씬 넘어보이는 중늙은이다.

 “저 수년 전에 은퇴하신 요네쿠라상이 제 대학선배인데 연락처가 좀 알고 싶어 왔습니다.”

 “그래요? 요네쿠라상과 저는 참 오래 같이 일했는데… 그러면 릿쿄(立敎)대학 출신이세요?”

 “아, 네.” 에이지는 요새 거짓말이 부쩍 늘어 아주 자연스럽다.

 “요네쿠라 선배 요새 뭘 하십니까?”

 “글쎄요. 책을 쓰신다고 하는데 술을 워낙 좋아해서 지금도 취해 있을지 모르죠. 일전에 본인이 밭에서 키운 야채라고 한 상자 회사로 보내오기는 했어요.”

 “요네쿠라 선배, 지금도 술은 니혼슈(日本酒)입니까”

 “웬 걸요. 옛날에는 니혼슈를 들었는지 몰라도 최근에는 몸에 좋다고 일본소주 밖에 안 마셔요. 특히 백년의 고독을 좋아하지요.”

 “백년의 고독이라면 제게 몇병 남아 있을 거예요.” 증권신문사를 나와 히로코가 말한다. 백년의 고독이란 일본소주의 명품으로 시중판매를 하지 않고 음식점 등에 한정판매를 하는 위스키맛이 나는 고급품이다.

 “내일은 백년의 고독을 들고 지치부(秩父)로 요네쿠라라는 이를 찾아가 볼까.”

 시간은 어느덧 퇴근시간이 되어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이 길을 메운다. 노타이 차림으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니는 에이지는 갑자기 소속을 잃은 철새의 고독에 휩싸인다.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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