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의 ‘객주’는 사농공상의 맨 끝자락에 위치한 조선시대 후기 보부상의 삶과 애환을 그린 대하소설로 한명의 영웅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여타 소설과는 달리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과 생명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의 집 금송아지가 비루먹은 우리 집 개보다 못하더라고, 남의 전대에 든 거금이 내 수중의 서푼보다 달가울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소설의 한 대목처럼 어느 한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정처없이 누비고 다니는 장돌뱅이의 세계를 맛깔스럽고 풍부한 우리말로 그려낸 작품이다.
개나리 봇짐을 걸머지고 이장 저장을 돌아다녀야 하는 장돌뱅이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거상들이 펼쳐놓은 난전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밑바닥 인생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정부 출연연구소 책임연구원들이 장돌뱅이 신세로 전락했다니 걱정이다.
인건비의 상당 부분을 외부 과제로 충당해야 하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도입됨에 따라 적어도 3개 또는 4개의 과제를 맡지 않으면 연초에 맺었던 연봉 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할 책임급 연구원들이 본연의 업무인 연구개발을 뒷전으로 미룬채 보따리 장수처럼 과제 따내기에 매달려야 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공계 진학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감각적 세대들이 어렵고 힘든 일을 외면하면서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화됐다고 하나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진 것은 과학을 담당해 온 정책당국자의 책임도 크다.
오죽했으면 연구만 해온 과학자들이 “존경과 대접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며 “자기 자식은 절대로 과학자의 길을 걷게 하지 않겠다”고 강변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박광선 논설위원 ks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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