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으셨다구요?” 사다코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무관심하다. 돌의자에 사뿐히 앉으면서 하는 말이다.
“네…” 에이지는 얼른 말을 잇지 못한다.
“참으로 오랜만이네, 사람이 찾아 오기는… 그 양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더러 사람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 양반이란 아키라의 부친을 가리키는 말일게다.
“그래, 나를 어떻게 아시나요? 나는 기억이 전혀 없는데… 그리고 이 여자분은?”
“아, 네… 저는 실은 아키라군의 친구입니다…”
“아키라?”
이 말에 사다코의 자세가 일변함이 느껴진다. 에이지와 사다코는 처음으로 얼굴을 서로 마주보고 응시한다. 동양여자치고는 눈 사이가 약간 벌어지고 얼굴은 완벽한 계란형이다. 80이 넘은 나이치고는 피부가 심하게 노화한 편은 아니다.
아키라라는 말에 놀라 동그랗게 떴던 눈이 가늘어지며 맑은 안경 너머로 눈물이 고여 나오는 것이 보인다. 좀 전의 다소 활발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기가 팍 죽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키라는 어떻게 알지요?”
“네. 대학교 동기생입니다. 그리고 JTT에도 같이 입사를 하였지요.”
“그래요. 그러면 우리집에 온 적이 있나요?”
전에 나를 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에이지는 사다코의 정신이 아직 그리 흐리지는 않음을 느낀다. 아마 과거 본인의 모습과 현재를 잠재의식에서 비교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에이지는 생각한다.
“아닙니다. 오늘 처음 뵙습니다.”
“그래요? 그래 어떤 일로…”
“네…” 에이지는 다소 뜸을 들이다가 준비한 거짓말을 말한다. “아키라군이 오랫동안 미국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현지법인의 사장으로 나가게 되었지요. 급히 출국을 하게 되어 제게 대신 인사를 드리고 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다코는 가만히 잔디를 내려다볼 뿐 말이 없다. 좁은 어깨는 살이 없으나 아직도 동그라운 것이 뼈가 가는 미인형이란 것을 말해준다.
“그래 성함이…?”
“아, 죄송합니다. 다나카 에이지라고 합니다.”
“그래요. 다나카상, 아까 피우던 피스 담배 하나 빌려주세요.”
“네?” 뜻하지 않은 주문에 에이지는 펄쩍 놀란다.
“후지사와상!”하면서 다소 떨어져 서 있던 간호원이 다가와 부인의 무릎을 잡으며 앉는다. 간호원이 아니라 손녀같은 모습이다.
“사오리짱. 괞찮아. 피우지 않고 냄새만 맡아보려고 그래.”
에이지는 사오리라는 이름의 어린 간호원을 보며 명령을 기다린다.
“피우시는 것은 절대 안되고 냄새만 맡아보는 거지요?” 어린 간호원은 걱정이 되면서도 사다코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모양이다.
에이지가 내민 담배를 코 밑에 대고 사다코는 냄새를 음미하듯이 조용하다. 갑자기 못의 물 흐르는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가 네 사람 사이를 파고든다. 물소리와 새소리를 담배냄새와 함께 충분히 감상한듯이 사다코가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요?”
“아, 네, 그게… 뉴욕입니다. JTT도 뉴욕증시에 상장을 하였거든요.”
“그래요… 뉴욕이라면 보스턴이 가까운데…”
“그렇지요…”라고 대답을 해놓고 에이지는 내심 놀란다. 필경 부인은 에리카가 보스턴에 있다는 것을 알며 아마 이를 꺼리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며 사다코가 일어선다.
간호원이 잽싸게 따라붙고 사다코는 에이지와 히로코에게 잠깐 기다리라는듯이 눈길을 주고 병동으로 몸을 돌린다.
둘의 기척이 멀어지자 에이지는 담배를 하나 더 피워 물며 연기를 내뿜는 소리에 섞어 감탄을 한다.
“햐! 대단한 미인인데… 오드리 헵번의 일본판 같지 않아?”
“글쎄 말이에요. 너무 예뻐요. 노인인데도…” 히로코가 거든다. “그런데 매우 영리하면서도 어딘가 혼이 나간 듯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글쎄…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 원래는 아주 영리한 분인데 무슨 충격에 시달린 것 같아.”
“저는 의학을 전혀 모르지만 자폐증이란 대개 어려서 나타나는 정신병인데 저 나이에 그런 것이 있을까요? 그리고, 자폐증 비슷한 증상을 가질 환경이 뭐가 있었을까?”
“허…” 에이지는 히로코 질문의 심도에 놀란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담배 말이에요. 아까 오실 때 옛날에 그 사람도 피스 담배를 피웠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아키라상의 부친을 말하는 걸까요?”
“글쎄…”
“저는 웬지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변기에 걸터앉은 사다코는 조용히 흐느껴 운다. 다나카 에이지라는 아키라의 친구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키라는 죽었다. 사다코는 그 낯 모르는 중년의 사내를 보는 순간 이를 느꼈다. 사다코가 사랑했던 이 세상의 유일한 인간, 그리고 제몸으로 낳은 유일한 자식 아키라는 죽었던 것이다. 어떻게 죽었을까? 이명이 다시 엄습해온다. 결핵약의 장기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이명이 오는 것이다. 시골집의 오래된 형광등처럼 전기 흐르는 소리가 귀안에 꽉 차게 들린다. 피로하고 산만하다.
요코다 그 인간. 젊었을 시절 사다코의 몸을 거침없이 유린한 그 인간을 아키라가 사람을 시켜서 죽인 것을 사다코는 안다. 이를 계기로 모자간의 관계는 금이 가고 불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요코다에 대한 분노와 원망에 몸을 떤다. 그리고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그이 몸이 생각난다.
사다코의 배 위에서 맹위를 떨치던 그의 몸. 사다코로서 너무나 싫었고 동시에 너무나 갈구하던 그 더러운 인간의 몸. 갑자기 사다코에게 정욕이 느껴진다. 여성 호르몬이 멈추고 80이 넘은 이 몸에 정욕이란 무슨 변괴인가? 결핵의 탓인가? 사다코는 이 불미한 생각을 떨쳐버리듯이 변기에서 일어나 나온다.
간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연못가로 돌아가는 사다코는 마치 자신의 음부가 젖어 오는 듯 환각을 느끼며 스무발이 채 안되는 짧은 거리를 오래 걸어간다. 80이 넘은 환자로서 성을 추구하는 리비도란 있을 수가 없음을 그녀는 안다. 그러나 가끔 몸과 액체의 수준이 아니라 상상과 추억으로 섹스라는 것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히곤 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감지한 이 순간에 찾아온 섹스에 대한 추억이 정녕 해괴하다.
돌의자에 앉아 못 건너를 보니 석양이 힘을 잃고 수국이며 여름동백을 오렌지 빛으로 채색하고 있다. 네 사람 모두 경치를 감상하며 누군가가 침묵을 깰지 기다린다.
“후지사와상도 피스 담배를 피우셨습니까?” 에이지가 묻는다.
“그래요. 나도 한때 많이 피웠지. 그 덕분에 결핵도 얻었지만. 옛날에는 지금의 피스 담배보다 훨씬 독했었어.”
“맞습니다. 저도 수년 전까지는 필터가 없는 오리지널을 피웠어요.”
“…”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바로는 피스 담배를 피우던 분이 또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알고 싶나요?”
“아, 그저… 그 사람도 그 담배를 피웠다고 하시길래… 아버님이었습니까?”
“아니. 그 양반은 술은 많이 했어도 담배는 가까이 하지 않았지.”
“그러면…”
“내 일에 상당히 관심이 많으시네.”
“아, 네…”하며 에이지는 말꼬리를 흐린다.
“요코다 도시오라고 하지요.”
“네?”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에이지는 놀란다. “누가 말입니까?”
“피스 담배를 좋아하던 그 사람…”
“아, 예.”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나니 에이지의 뇌리에 이 요코다 도시오라는 이름이 어디선가 접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지나간다.
“후지사와상, 이제 병동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어린 간호원이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그래…” 마치 손녀아이의 어리광을 받듯이 사다코는 인자하게 대답하며 순순히 일어선다. 에이지와 히로코도 같이 일어나 엉거주춤 서있는데 사다코가 병동으로 발을 한걸음 옮기다 서서 에이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별의 순간이다. 아들의 친구를 통한 아들과의 이별이다.
“아키라와 나 사이를 파괴한 인물이 요코다 도시오야.”
“네?” 에이지는 뜻하지 않은 부인의 말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리고, 아키라에게 돌아가면 전해주세요.”
“네, 물론이지요.”
“잘 가라고… 에미도 곧 따라간다고. 사요나라.”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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