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편지](6)에리카에 대한 상흔

 1999년 6월 5일, 도쿄도 구니타치시.

 JR 구니타치역을 빠져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오전 11시에 가깝다. 아직 6월 초인데 장마가 오는지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뜨겁다. 에어컨이 들어오지 않는 전차에 앉아 있으며 에이지의 등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어서 어디 가서 맥주나 한잔 들이키고 싶다.

 학창시절 와본 구니타치 역전 풍경은 새 건물들이 들어섰을 뿐 크게 변한 게 없는 인상이다. 문화의 도시라서 일본 전국에서 유일하게 파칭코가 없고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는 도시. 역 앞에는 독일의 어느 도시를 본따 만든 넓은 중앙로가 곧게 뻗어 있고 그 좌우 대각선 도로를 따라 상점가가 있다.

 인위적인 도시다. 이름도 이웃의 고쿠분지(國分寺)와 다치카와(立川)의 두 글자를 따 구니타치(國立)라 하였으니 처음 듣는 사람은 국가에서 세운 도시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그래도 도쿄의 위성도시 중에는 윤택한 곳이어서 상점들이 고급스럽다.

 제과점에서 노인네들이 좋아할 셈베이를 한상자 사든 에이지는 중앙통을 설렁설렁 걸어 올라간다. 아키라, 그리고 에리카와 한통속이 되어 놀던 학창시절 에리카의 큰아버지가 사는 구니타치에 야자쿠라 구경을 온 것이 벌써 29년 전인가? 일본의 명문 상과대학이 있는 히토츠바시대학 부근의 사쿠라는 아름다웠고 젊은이들이 많아 대학제 분위기였다.

 히토츠바시대학에서 교수를 하던 에리카의 큰아버지댁에 셋이 잠깐 들른 것은 그때였다. 29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에리카의 큰아버지 댁을 지도에서 찾아보니 중앙통의 끝부분이고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 요시나가 사유리가 사는 곳으로 유명해진 동네임이 틀림없다.

 사쿠라나무가 줄을 이은 넓은 인도를 따라 걸으며 에이지는 천천히 옛일을 되새겨본다. 반항과 격동의 학창시절.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회사생활.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의 친구가 아닌 아키라와 에리카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한 20분을 걸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광경이 들어온다. 오래되어 보이는 구멍가게에서 음료를 하나 사 마시며 히토츠바시에서 교수를 하던 모리상의 집을 아냐니까 주인은 밖으로 나와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모리 유지로. 긴 돌담장 위로 소나무들이 보이는 큰집의 대문치고는 조락한 나무문에 붙어있는 명패이다. 찾아오긴 잘 찾아왔다. 초인종같은 것도 없어 ‘고멩 구다사이(실례합니다)’하고 외치며 문을 밀고 들어선 에이지는 순간 숨이 멈출 듯하다. 한 50평 남짓한 정원이 너무 아름다운 까닭이다.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일본 정원의 정수를 보는 듯하다.

 돌담장의 안쪽은 삼나무를 촘촘히 이은 울타리로 삥 돌아쳐 밖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새로운 자연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대문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길은 자연석을 두줄 깔아 이어 놓았으며 굵은 대나무를 엮은 얕은 펜스가 따라온다. 바닥은 일본종 잔디가 얇게 깔려있고 물이 뿌려져 있어 공기마저 서늘하고 상쾌하다.

 한구석에는 낮은 석등에 불이 은은하게 들어와 있고 그 옆에 작은 못이 있어 시시오도시(물이 차면 기우는 대나무 대롱)가 결려있다. 더위와 짜증을 잊고 오밀조밀한 정원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는데 시시오도시가 기울며 ‘철퍽’하고 못으로 물이 쏟아진다. 이 물소리가 마치 신호라도 되는양 괴물 코고는 듯 낮게 퍼져 울리는 인간의 소리가 들려 에이지는 깜짝 놀라 소리의 진원을 바라본다. 정원을 내려다보는 마루 위의 안락의자에 얼굴에 검버섯이 새카맣게 내린 노인이 담요를 두르고 앉아 문제의 소리를 내고 있는데 잘 들어보니 하이쿠(일본시조)에 틀림이 없다.

 “실례합니다. 다나카 에이지라고 합니다만, 모리상이십니까?”

 노인은 멍하니 쳐다보며 대답도 없다. 80은 족히 되어 보인다. 29년 전 찾아 왔을 때 중년이 지난 모리 교수였으니 이제 그쯤 되었으리라. 당시 알아주는 사회학자였는데 치매라도 걸린 것일까?

 말상대가 안됨을 간파한 에이지는 좀 더 큰 소리를 내어 사람을 부른다.

 “고멩 구다사이.”

 “하이, 하이”하는 여자 목소리가 나며 안채에서 사람이 돌아 나온다. 모리 교수의 부인임에 틀림없다. 자그마한 여자 노인네가 아직 귀여운 맛이 드는데 한떨기 민들레같이 수수하고 온화하다. 연령은 60이 좀 넘었을까? 모리 교수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 보인다. 맞아. 그러고 보니 당시 큰 아버지가 독신으로 있다가 대학원생 제자와 결혼하였다는 에리카의 말이 떠오른다.

 “부인이십니까?. 저는 다나카 에이지라고 하는데 혹시 기억하실지. 학창시절 도쿄대에 다닐 때 에리카양, 아니 후지사와 에리카상과 함께 한번 찾아뵌 적이 있는데.”

 “글쎄요. 에리카가 학생시절이라면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인데…”

 이 때 모리 교수의 짐승같은 낮은 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그런데, 교수님이 시조를 읊으시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립니까?”

 에이지의 솔직한 질문에 부인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우며 설명한다.

 “아마 대정시대의 무라카미 기조라는 시인의 하이쿠일 거에요.”

 

 넨리키(念力)노 유루메바 시누루 다이쇼카나

 (염력을 놓치면 죽을 정도의 더위로고)

 

 “요새 더위가 오면서 저 시로 레퍼토리가 바뀐 모양이에요”하며 웃는데 부인의 남편에 대한 정이 전해지는 듯한 말씨이다. ‘아직 재혼을 해도 될 모습인데 저런 송장 곁에 있다니. 참 남녀의 인연이란…’하고 생각하며 “아, 그렇군요”하고 뭐 좀 알겠다는 듯이 에이지는 대답한다.

 “그런데 에리카에게는 무슨 일로…”

 “네, 그것이…. 부인,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어서 들어오세요.”

 부인을 따라 들어간 응접실은 정원이 보이도록 다다미 10조가 시원하게 깔려있고 정결한 옻나무 상이 가운데 놓여있다. 부인이 맥주와 보리차를 쟁반 가득히 가져오며 “더우니 우선 맥주를 한잔 하시지요”하는데 반갑기 그지없다. 더구나 에이지가 좋아하는 홋카이도의 삿포로 맥주다.

 “카, 시원하다. 사실은 제가 홋카이도 출신이거든요. 삿포로 맥주 정말 맛있습니다”라고 에이지가 주절거려도 부인은 다소곳이 웃으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저… 후지사와 아키라군 아시지요? 에리카양의 남편 말입니다.”

 “그 사람이라면 에리카와 이미 이혼을 했지요. 모르셨나요?”

 “글세 그게… 같은 회사에 근무하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를 않아…”

 “근데 그게 지금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건가요?”

 “사실은… 말입니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아 에이지는 맥주를 한잔 더 들이키고 담배를 피워 문 후 연기와 함께 나지막히 뱉어낸다.

 “죽었어요…”

 “네? 누가요? 후지사와상이? 저런… 그런 인재가…. 아니 아직 젊은데 어떻게 죽었답니까?”

 “회사 건물에서 투신자살했습니다.”

 부인은 경악해서 말을 못하고 귀엽던 얼굴에 갑자기 나이가 몰려오는 듯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후지사와, 아니 모리 에리카상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부인이 대답은 안하고 “저도 맥주를 한잔 해야겠군요”하며 마른 목을 축인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고 시시오도시에 물 고이는 소리만 들려온다.

 “미국으로 갔지요. 벌써 한 15년 됐나요.”

 “미국으로요? 아니 미국은 왜…”

 체념한 듯 부인이 차근차근 말한다.

 “에리카는 결혼생활이 별로 순조롭지 못하여 보스턴으로 유학을 갔다가 후지사와상과 이혼한 후 미국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지요. 브랜다이스대학이라는 곳의 지도교수였는데…”

 “에리카상의 주소나 전화번호라도 알려주시겠습니까?”

 “글쎄… 그건 본인의 허락이 없이는…”

 더 이상 말해 봐야 대답이 없을 거라고 판단한 에이지는 담배를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서는 시늉을 하며 한마디 더 묻는다.

 “혹시 그 미국인 교수의 이름을 아십니까?”

 “네…” 잠깐 뜸을 들이다 그 정도라면 하는 느낌으로 “코헨이라고 할 거에요. 스티브 코헨.”

 “실례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나오는 에이지의 등 뒤로 모리 교수의 시조가 다시 한번 퍼진다. 에이지의 몸은 식을 대로 식어 죽을 정도의 더위는 커녕 춥고 오줌이 마렵다.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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