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1일 도쿄 제국호텔.
“팍! 팍! 팍!”
세계에서 온 수십명의 사진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린다. 일본을 대표하는 제국호텔의 최고급 연회실 쓰루노마. 분홍색 카펫과 황금빛 벽의 조화가 고급스러우면서도 선정적이다.
사원 25만명을 가진 공룡기업 JTT의 분할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막 시작되었다. 단상의 테이블에는 마미야 사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층이 상기된 얼굴로 일본 산업사의 한 분수령이 될 사안을 발표한다. 마미야는 세계적인 기업의 사장치고는 좀 투박하고 촌스러운 얼굴이다.
“JTT는 이제 단일기업으로서 47년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분할하게 됩니다. 당사는 1952년 발족하여 일본 국민에게 통신서비스를 충실하게 제공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분사화, 독립화를 추구합니다. 기본 통신서비스는 주식회사 JTT동일본과 주식회사 JTT서일본이 나누어 제공하고 국제전화를 포함한 장거리 전화는 JTT커뮤니케이션이 맡아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업들의 지주회사로서 JTT홀딩스가 사업총괄과 연구개발을 담당할 것입니다.”
이미 언론을 통하여 발표된 내용이지만 막상 공식 발표를 듣는 JTT의 임원들은 가슴속이 복잡하다. 특히 이 분할계획의 수립과 집행을 초기부터 지휘해온 아키라는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는 성취감보다는 뭔가 허탈하고 피곤하다.
마미야 사장의 연설은 지속된다.
“JTT의 역사는 전후 일본의 경제기적과 궤를 같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광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본에서 전화가 창업된 것은 1890년이며 그 이전에 아시아 대륙으로 전신설을 연결하였습니다….”
100년의 영광….
이 대목에서 아키라의 상념도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JTT의 역사가 영광의 역사였다면 아키라 가문의 역사는 비밀과 반항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 두 역사가 이제 아키라라는 한 인간을 통해 교차하고 있다.
할아버지 히로시. 아니 지금은 일본에서 아무도 모르는 조선인 조상덕이 부산에서 일본인 전신기사를 따라 온 것이 어언 100년 전. 그 사이 조상덕의 손자는 완전한 일본인으로 변하여 일본을 리드하는 기업 JTT의 분할이라는 역사적인 일을 해냈던 것이다.
“우리 JTT는 1985년에 민영화라는 거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후 이제 분사화를 통하여 도도히 밀려오는 새로운 정보통신의 물결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아키라의 상념이 죽은 할아버지에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마미야의 발표는 거의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이 곧 시작될 상황이었다.
아키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JTT 사장단이 통신을 관장하는 우정성 대신을 방문하여 분할발표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보고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신의 관방실과 스케줄 확인이 필요하다. 기자회견장을 살며시 나왔을 때 소매를 당기는 이가 있다.
“고쿠로 사마(수고했어).”
80이 훨씬 넘어 보이는 갸냘픈 노신사가 입에서 고구마 썩은 냄새를 풍기며 속삭이는데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언뜻 기억이 안난다. 그래도 낯이 익다고 느끼며 머뭇거리는데 노신사가 입을 연다.
“나 하세가와일세.”
“하세가… 하세가와 부장님?”
“이제야 알아보는군. 섭섭하구만.”
노인의 말에 빈정거림이 묻어있다. 하세가와라면 아키라가 JTT의 전신인 대일본 전전공사(電電公社)에 입사할 당시의 인사부장이 아니던가? 이 늙은이가 아직 죽지 않고 여길 왜? 이 때 아키라의 속을 들여다 본듯 하세가와가 내뱉는다.
“자네 사람 또 죽였나?”
이 한마디에 아키라의 얼굴은 흙빛이 되고 숨이 막힌다. 지네 침을 맞은 듯 연회장 복도의 벽에 기대어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아키라에게 하세가와는 작으나 또렷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네놈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 조센진(조선인)놈.”
북어같이 말라 가벼운 하세가와가 제국호텔의 고급 양탄자를 헤쳐 모서리를 돌아가는 몇초가 아키라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조센진….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변기 위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앉아 타일 바닥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아키라의 뇌 속에는 두통과 함께 수많은 기억이 용솟음친다.
일본 통신업계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이라면 다 알고 칭찬하는 일본인 후지사와 아키라가 실제로 한국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가족 이외에는 없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두사람. 아키라의 입사시 인사부장이었던 하세가와와 인사계장이었던 요코타다.
당시 전전공사에 들어가기란 국가고시에 못지않은 바늘구멍이어서 합격자의 배후를 철저히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둘은 후지사와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키라의 아버지는 이 둘의 입을 엄청난 돈과 살해의 위협으로 막지 않았던가. 그리고 인사계장이었던 요코타 쓰네오, 그 개자식은 오사카항의 물속에 시멘트 기둥에 묶여 영원히 가라앉아 있다. 그 비밀을 하세가와가 알 턱이 없는데….
더 이상 화장실에 앉아있을 수 없어 아키라는 경황 없이 나와 우정대신 관방실에 전화를 건다. 어떻게 전화를 했는지 생각이 안날 정도로 혼란한 마음으로 전화를 마친 아키라가 기자회견장에 돌아왔을 때 기자들은 다 빠져나가고 마미야 사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진만이 남아있다.
“어, 후지사와군. 수고했네. 자네의 수훈이야.”
회사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던 아키라에게 오늘은 사장의 따뜻한 말조차 귀찮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사장님의 지혜를 실천했을 뿐입니다.”
판에 박힌 아부의 말이 입에서 자동적으로 나온다.
“자, 그럼 우정성으로 가지.”
우정성 방문을 동행하는 아키라의 마음 속에는 과거 수십년간의 사건들이 순서 없이 떠올라 아우성친다. 대신과 사장의 내용 없는 대화를 감격하여 듣는 척 앉아있다가 우정성을 나섰을 때는 이미 뉘엿뉘엿한 저녁이다. 일본을 지배하는 관청들이 모인 가스미카세키의 회색 건물들이 오늘따라 더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1999년 6월 2일 밤 아카사카의 요정 마이즈루(舞鶴).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
과연 JTT의 사장이 뜨니 늙은 게이샤로부터 어린 게이샤까지 열명 이상이 줄을 서서 깊이 머리를 숙이고 입을 맞추어 환영인사를 한다. 옛날 사무라이가 긴 칼을 차고 백성의 목을 맘대로 벨 수 있었을 때 농민들은 이렇게 인사를 했으리라. 고개 숙인 젊은 게이샤 목덜미의 가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아키라는 오랜만에 지배자의 성욕을 느낀다.
우정성 방문이 끝난 후 제국호텔에서의 리셉션이 끝나고 JTT 사장이 애용하는 요정 마이즈루에 들어설 때 아키라의 심경은 충격에서 혼란을 거쳐 체념으로 점차 바뀌고 있었다.
다다미 40장 정도는 깔아놓은 듯 넓은 연회실의 가운데에는 이미 술상이 준비되어 있고 전통무용을 하는 기생이며 가라오케 밴드가 복도 밖에 보인다. 창밖으로는 일본식 정원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고 도시의 소음과 자극이 죽은 듯 조용하다. 손님수대로 게이샤들이 들어와 앉고 파티가 시작되어도 아키라의 마음은 조금도 즐겁지 않다. 술을 따르고 사장이 건배를 한다.
“자,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새로 태어나는 JTT그룹의 성공을 위하여 간파이!”
“간파이!”
60이 넘은 이들이 모처럼 활기차게 외친다.
게이샤들의 전통 춤이 끝나고 가라오케가 시작되어 차례로 노래를 부른다. 아키라의 차례가 되었다. 평소같으면 사양하련만 오늘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미나미 고오세츠의 간다가와(神田川)를 시킨다.
그대는 이미 버렸을꺼야
24색 크레파스를 사서
그대가 그린 내 얼굴 그림
잘 그려봐 그래도
전혀 닮지 않았었지
창문 아래로 간다가와가 흐르던
작은 하숙방
내가 쳐다보는 곳을 가리키며
슬프냐고 그대는 묻곤 했지
젊었던 그 시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어
다만 그대의 부드러움이
두려웠을 뿐이야
아내 에리카의 얼굴이 떠오르며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노래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아키라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자신을 버리고 미국인의 품에 안겨버린 에리카. 결핵과 정신이상으로 입원한 어머니 사다코. 자신을 지탱해주던 이 두 여인이 없는 세상에 남은 것이라고는 청부살인의 전과뿐이라는 참담한 생각에 이른다.
많이 본 뉴스
-
1
단독서울시, 애플페이 해외카드 연동 무산…외국인, 애플페이 교통 이용 못한다
-
2
세계 1위 자동화 한국, 휴머노이드 로봇 넘어 '다음 로봇' 전략을 찾다
-
3
국산이 장악한 무선청소기, 로봇청소기보다 2배 더 팔렸다
-
4
삼성 파운드리 “올해 4분기에 흑자전환”
-
5
CDPR,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무신사 컬래버 드롭 25일 출시
-
6
4대 금융그룹, 12조 규모 긴급 수혈·상시 모니터링
-
7
하루 35억달러 돌파…수출 13개월 연속 흑자 행진
-
8
[미국·이스라엘, 이란 타격]트럼프, '끝까지 간다'…미군 사망에 “반드시 대가 치를 것”
-
9
2조1000억 2차 'GPU 대전' 막 오른다…이달 주관사 선정 돌입
-
10
삼성전자 반도체 인재 확보 시즌 돌입…KAIST 장학금 투입 확대
브랜드 뉴스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