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솔루션을 개발하는 서울 서초구의 H사는 최근 두달째 투자심사를 진행하던 벤처캐피털로부터 최종적으로 투자불가 방침을 통보받았다. 회사가 좋기는 하지만 지금 여건에서는 투자가 어렵다는게 이 회사를 담당한 심사역의 설명이다.
개인적으로 욕심이 가는 회사지만 투자하고 2, 3년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다. 벌써 벤처캐피털로부터 다섯번째 똑같은 답변이다.
제품개발이 막바지에 들어가 조만간 양산에 들어갈텐데 무슨 소리냐고 항변했지만 본격적으로 매출을 올리고 기업의 모양을 갖춰 코스닥에 등록, 투자를 회수하기까지 기다리기는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앞날이 막막합니다. 몇년간 고생해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일보직전인데 제품 양산에 필요한 자금을 구할 수 없으니 저를 믿고 그동안 따라와준 직원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장에서 제품 출시 시기를 늦출 수도 없고 말입니다.” H사 최 사장의 말이다.
그렇다고 정부 자금이나 은행권에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정부 자금의 경우 내놓기가 무섭게 동이 나고 은행의 경우 담보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금신청 시기를 놓치고 부동산 등 담보가 없는 이 회사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기술개발보다 돈 구하기가 어렵다는 걸 이제야 실감하고 있습니다. 10여년을 엔지니어로 살아오다 제대로된 제품만 만들어내면 나도 사업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게 제 한계인 것 같습니다.”
테헤란로에 있는 C사의 K 대표는 최근 벤처기업 대표들로부터 전화를 몇통 받았다. 직원들에게 임금으로 줄 자금 2000만∼3000만원만 급히 빌려달라는 하소연이다.
그는 자금이 떨어져가는 벤처기업들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벤처대란설’이 2, 3달을 주기로 나돌 정도로 벤처기업의 자금사정이 날로 나빠지고 있다.
벤처업계 일부에서는 자금이 고갈돼 올 겨울을 넘기지 못하는 벤처기업이 속출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벤처빙하기’가 곧 닥칠 것이라는 경고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벤처기업이 몰려있는 서울 강남지방노동사무소에는 체불임금을 호소하는 근로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쇼핑몰 운영업체 N사의 경우 실질적인 경영자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도피해 근로자들이 단체로 진정을 낼 예정이다. DVD업체인 G사에 근무하는 B씨는 7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제대로 운영되는 기업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도 벤처의 자금줄인 벤처캐피털들이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다. 경기회복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데다 투자회수 시장도 제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흙 퍼서 장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벤처캐피털도 기업인데 이윤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를 하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테헤란로에 위치한 한 벤처캐피털 사장의 말이다. 이 때문에 벤처기업은 자금확보에 더 목이 타고 있다.
한국기술투자는 지난해 당초 투자금액의 절반 수준밖에 투자를 하지 못했다. 시장여건이 최악인 데다 투자자금 회수 길도 막혔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지난 2000년에는 1280억원을 투자했다.
대기업들도 대부분 벤처기업에 대한 신규투자를 중단한 상태다.
2, 3년 전 의욕적으로 벤처기업에 대해 투자했던 한 대기업 간부는 “새 업체에 대한 투자는 생각하지도 못한다”며 “이미 투자한 기업의 주식을 처분하는데 골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투자위축으로 벤처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해지면서 임금체불과 부도가 늘고 있는 것은 물론 기업매물도 홍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경기침체까지 겹치자 기술력있고 사업전망이 밝은 벤처기업들마저 함께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량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 등 다각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벤처기업의 침몰을 막기 위해 모든 기업을 살릴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할 수는 없다. 따라서 기술력이 있는 ‘우량벤처’에 대한 선별지원이 시급하다는게 벤처기업인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와 관련, 벤처기업 한 관계자는 “벤처위기는 프라이머리CBO 등에 의존해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온 일부 부실벤처기업들을 걸러내는 측면도 있다”며 “벤처기업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금전적인 지원이 당장 힘들다면 기업 인수합병(M&A) 제도를 정비해 기업들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넓여야 한다. 특히 벤처기업들간 사업모델을 강화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M&A가 활성화돼야 한다. 현재 여러 가지 규정개정이 이뤄지고 있다고는 하나 실제 M&A를 하는데는 어려움이 많다.
코스닥 등록기업인 A사의 경우 지난해 자사 사업모델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벤처기업을 인수하려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코스닥 등록기업에 인수되는 피인수기업은 코스닥 등록요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을 돕는 방안도 강구돼야 한다.
좁은 내수시장에서의 과당경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벤처기업들이 해외진출을 통해 활로를 찾을 수 있도록 벤처인큐베이팅사업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래야 투자-자금회수-재투자로 이어지는 벤처캐피털 자금의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나마 벤처캐피털들의 투자회수를 가로막던 로크업제도가 개선된 점은 긍정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술개발이 100%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50%는 되어야 벤처가 벤처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 아니냐”며 돌아서는 H사 사장의 뒷모습에 그늘이 드리운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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