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보기술(IT) 업계가 요동치고 있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기침체 속에서 90년대 중반 세계 산업계에 ‘한줄기 빛’으로 떠올랐던 IT 붐이 가라앉으면서 미국·일본·유럽 등이 새로운 경제회생을 위해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IT를 경제회생의 도구로 삼았던 국가들은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는 “IT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판단아래 ‘포스트IT’를 준비하고 있는 분위기다. 현재의 상황을 수긍하면서 한편으로는 IT부문이 21세기를 맞아 전기를 맞은 것으로 판단하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너나할 것 없이 ‘더 나은 IT(better IT)’를 들고 나오고 있다. 각국 정부는 기술을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각국이 IT부문에서 승부수를 띠우면서 경쟁은 전례없이 격화되고 잘 세운 국가전략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일본·유럽 등 세계 경제의 3대 축은 사상 유례없는 동반 침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닷컴 붕괴와 함께 진작부터 예상됐던 경기둔화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올해부터는 완전한 침체상태에 빠져 있다. 10년간의 장기 호황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10차례 이상 금리를 인하하고 세금감면 등 부양책을 폈으나 경기회복은 아직 요원한 실정이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은 디플레이션과 불황의 심화로 경제가 침몰하고 있으며 유럽도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는 등 경기둔화 조짐이 역력하다. 중남미의 경우 브라질에 이어 아르헨티나 경제가 위기에 빠져드는 등 경기불안이 전대륙으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만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편입하면서 도약의 날개를 단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2∼3년간의 세계 경제지형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했다. 유럽이 단일 국가를 향한 첫발을 내딛었으며 초기 단계로 15개국이 통화를 단일화했다.
지난해에는 경기가 바닥을 친 데 이어 상승하리라는 일반의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증유의 테러사태가 발생해 경기회복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테러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 대한 보복전쟁으로 이어지면서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확전위기가 상존함에 따라 세계 경제의 발목을 붙잡는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세계 7위 무역대국인 중국이 143번째로 WTO에 가입, 세계 경제질서 재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됐다.
IT 패러다임도 급변했다. 변화의 중심에는 ‘디지털 혁명’으로 지칭되는 인터넷이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 분야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기반한 각종 신기술이 속속 상용화되고 있으며 특히 인터넷은 전자상거래를 타고 세계 경제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최근에는 모바일과 결합하면서 산업군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IT가 비즈니스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다고까지 평가받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IDC와 포레스터리서치·가트너그룹 등은 입을 모아 늦어도 내년에는 본격적인 m커머스, 즉 모바일 상거래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 업계 전반에 ‘융합(convergence)’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통신과 방송, 온라인과 오프라인간 융합은 물론 기업간 및 이업종간 융합이 매일아침 뉴스를 장식한다. 지난 80년대 말부터 일기 시작한 이러한 통합의 움직임은 21세기에 접어들어 기존 관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네트워크간, 온라인 기업간 통합은 이미 일어나고 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대대적인 결합, 즉 합병과 통합은 새로운 비즈니스모델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오프라인 기업의 온라인화는 산업사회를 이끌었던 국가·산업·사업·서비스·기술의 경계가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전통적인 산업구분 방식이 사라지고 신산업 모델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통합은 분산·분할이 중심이었던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기업과 사회내 조직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점쳐진다.
생명기술(BT)·나노기술(NT) 등 IT유관 산업들이 그동안의 성과에 힘입어 결실을 얻어내고 있다. 복제양 돌리와 인간게놈프로젝트의 발견은 이러한 성과의 결집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각국 정부와 IT업계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일본의 부상으로 한동안 세계 최고 하이테크 국가의 위치가 흔들렸던 미국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인터넷의 부상으로 IT분야에서 주도권을 잡고 재도약의 기회를 노렸으나 닷컴의 붕괴에다 테러 및 보복전쟁, 여기에다 금융스캔들까지 겹치면서 IT를 엔진으로 삼으려던 전략에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 2000년 후반 미국의 닷컴기업들의 붕괴에서 비롯된 IT 불황은 개선되기는커녕 전세계로 확대 재생산됐다. 불황의 희생양은 인터넷업계에서 컴퓨터와 통신으로 확산됐다. 초우량 IT기업들까지 자금줄이 막혀 한순간에 도산하는 사례까지 속출했다.
하지만 미국은 IT산업의 강점을 바탕으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세계 하이테크의 심장인 실리콘밸리에서는 불황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기술과 제품 개발 등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분주하다. NT·BT의 위력은 벌써 나타나고 있으며 무선통신 등의 분야도 각광받고 있다. 또 기업들은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겨냥, 게임기·스마트폰·홈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갖춘 PC 등 IT를 응용한 제품 개발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유럽은 ‘과거의 영화’나 즐기던 데서 벗어나 BT에 승부를 걸었다. 유럽 각국 정부들이 BT분야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유럽 전체적으로 민간 BT기업 수에 있어도 미국의 1100여개보다 700개나 많은 1800여개고 2000년 기준 유럽에 상장된 바이오테크 기업들의 매출도 43억9300억유로에 비상장 기업까지 합치면 86억7900억유로에 달한다. 전세계 각국에서조차 부러워하는 BT 파워를 갖춰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일본은 제조업을 불황탈피책으로 삼았다. 기계와 부품류에서 보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기술력을 바탕으로 IT분야에서도 조만간 세계 최강으로 부상하는 계획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다. 여기에다 소니와 도시바·마쓰시타·샤프 등은 가전이라는 꼬리표를 잘라내고 IT기업으로의 변신하며 IT 일본 경제의 견인차가 되고 있다. 또 이동통신 회사 NTT도코모가 모바일 콘텐츠 서비스인 ‘i모드’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시장 석권을 노리고 있다.
세계 IT업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국가는 단연코 중국이다. 저가의 풍부한 노동력과 저렴한 생산환경을 보유한 중국은 세계 시장에서 WTO 가입으로 투자환경이 좋아지면서 각국 유수 기업들이 이전, 세계의 공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중국의 미래를 높게 평가한 기업들이 연구개발(R&D) 근거지를 속속 중국으로 이전하고 있어 IT대국으로의 도약은 시간문제로 여겨진다.
이처럼 IT업계에 ‘중간만 해도 통하던 시대’는 더 이상 없다. 제자리에 서있으면 뒤지는 시대도 아니다. 제자리에 서있으면 도태되는 ‘절대 경쟁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이런 싸움의 한 가운데 대한민국이 서 있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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