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특집>새로운 20년-나쁜 관행을 버려라

 지난 5년 전 IMF 직후 국내 기업들 사이에선 자성을 촉구하는 비판적 목소리들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당시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를 경험했던 기업들 가운데는 처절한 반성을 통해 갱생한 기업도 있고, 결국 쇠락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한 회사도 많다. 하지만 IMF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왔다는 지금, 누군가가 당시의 쓴소리를 되새긴다면 진부한 도덕론이라며 고개를 돌릴지 모른다. 국내 기업들의 나쁜 경영관행에 대한 질타는 어느샌가 쑥 들어가 버렸고, 이젠 아무일 없었다는 듯 예전의 폐해를 거듭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20년을 준비하는 지금 우리에겐 극복해야 할 경영관행이 여전히 적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편집자

 메인박스-국내 기업문화의 폐해 현장

 사례 하나. “혹시 하룻밤 술값을 정해진 가격없이 부르는대로 매기는 술집을 아십니까. 적어도 접대를 하려면 그런 곳에서 해야 받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3대 정보기술(IT) 컨설팅회사에 속하는 모기업 영업담당 임원의 변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꿈도 꿔보지 못할 최고급 술집에서 접대를 받을 만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사례 둘. 소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이니셜) 출신이 아니면 발도 못 붙인다는 증권가. 증권가에선 여기에 더해 직종마다 보다 세분화(?)된 학맥이 형성된다. 애널리스트로 성장하려면 미국 5대 MBA 스쿨을 나와야 한다는 둥, 펀드매니저로 크려면 학부는 서울대, 대학원은 또 어디 출신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펀드매니저들 사이에선 학맥에 끼지 못할 경우 아예 투자정보가 차단되기도 한다. 애널리스트끼리도 서로 파벌을 형성, 이른바 ‘왕따’가 종종 생겨난다.

 겉으론 지식 상류층으로 자처하는 기업현장이지만 몸소 다가가보면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고질병들이다. 인맥위주의 기업문화, 과다한 접대문화, 복잡한 의사결정과정, 경영철학의 부재, 연공서열에 따른 인사평가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숱한 병폐들이 우리 기업들엔 여전히 남아있다. 마치 역사속의 전통처럼 뼛속 깊이 체화된 듯, 한세대가 바뀌기 전에는 전혀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기업 경영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노조나 시민단체, 소액주주들의 주장이 명분을 얻는 것은 결국 이런 경영관행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은 국내 기업문화가 가장 비자본주의적인 천민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꼬집는다.

 재벌위주로 형성된 국내 산업환경의 왜곡된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은 족벌경영체제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가 발간한 ‘전환기 CEO의 역할과 경쟁력’이라는 보고서는 국내 10대 그룹 CEO 중 외부에서 영입된 전문가가 전체의 6%에 불과하다고 꼬집은 바 있다. 전문경영인의 평균 재직 햇수도 미국의 절반에 못 미치는 2.9년 정도.

 외국계 기업이 국내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냉랭하다. 모토로라코리아 최인학 상임고문은 얼마전 세미나를 통해 △기업가정신의 결여 △기업가의 노력과 창의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풍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 △만연한 부정부패 △상거래의 계약과 규범에 필요한 준법정신의 부재 등을 우리 사회에 팽배한 기업 경영의 문제점으로 적시했다. 컨설팅 업체인 매킨지 서울사무소 로버트 펠튼 대표도 한때 한국이 멕시코의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며 경고한 바 있다. 그는 국내 기업들의 4대 필수개혁 과제로 △비핵심분야 정리 △수익성 개선 △성과중심의 기업문화 △독립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 정착 등을 꼽았다. IMF 당시에도 누차 강조됐던 공통 과제였지만 어느 것하나 제대로 개혁해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서울대 정운찬 교수는 심지어 “기업규모에 상관없이 망해야 할 기업은 망해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결국 원칙과 기본에서 벗어난 현실을 바로잡고, 기업경영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의식개혁이 절실한 시점이다. 올초 효성·삼양사·태광산업 등 중견그룹들이 선대 창업주의 기업가 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펼쳤던 것은 작지만 의미있는 실천이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버려야 할 경영관행 10가지 ■

세계 최대 신용카드 브랜드인 비자코리아는 새로운 20년을 준비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버리고 가야 할 10가지를 꼽았다. 신용 후진국이라던 한국이 불과 몇 년 새 신용카드 대국으로 급성장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내 기업들에 권고하는 메시지다.

 하나, 혈연·학연·지연 등 인간관계 중심의 기업경영. 낙하산 인사나 구조조정 지연, 기업 내부에서 빈발하는 각종 부정행위 등 모든 폐해가 결국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법이다. 이같은 관행은 특히 열심히 일하는 다수 직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다.

 둘, 족벌경영체제. 여전히 전문경영인이 발붙이기 힘든 국내 사정을 지적하는 것이다. 전문경영체제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회사 운영을 위해 반드시 확산돼야 하는 과제.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는 30대 그룹마저도 아직 전문경영인 체제에는 인색하다.

 셋, 연공서열·호봉에 따른 인사평가시스템. 많이 나아진 게 사실이지만 연공서열의 절대적인 비중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능력위주의 인사평가시스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경영문화다.

 넷, 직원들을 단순 월급쟁이로 전락시키는 기업문화. 결국 사내 직원의 경쟁력과 전문성은 기업의 핵심 자산으로 승화된다는 점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순환보직식 인사관행을 타파하고 전문화된 일꾼을 만들어내는 시도가 필요하다.

 다섯, 재교육의 기회를 상실한 기업문화. 조직이 늘상 변화,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재교육과 재충전이 필요하다.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자극제를 부여하거나 사내 교육프로그램을 가동하는 등 교육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중요하다.

 여섯, 주먹구구식 직원평가시스템. 기업은 회계연도 시작 시점에 개별 직원들이 1년간 수행할 과제를 계량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성취도에 따른 인사고과 및 연봉조정은 업무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인사의 공평성과 성과관리, 책임소재 규명 등을 위해서도 개선할 과제다.

 일곱, 과다한 접대문화.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안에 뿌리내렸는지 모를 정도로 만성화된 문제점이다. 늘상 지적되지만 접대는 합리적인 의사판단를 가로막고 당사자들을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접대문화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때 비로소 성숙한 기업 경영이 가능해질 것이다.

 여덟, 지루한 의사결정 과정과 복잡다단한 문서작업. 대기업·중소기업 할 것 없이 신속한 의사결정 구조는 기업의 능동적인 변화를 이끄는 열쇠다. 대다수 사무직원들의 절대적인 업무량은 과도한 문서작업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불필요한 의사결정 단계와 문서작업을 과감히 줄여야 한다.

 아홉, 실종된 기업경영 철학. 기업은 이익 창출이라는 근원적 목표와 함께 사회 환원의 책임도 있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물·공기와 같은 공공의 재화를 공유하는 것처럼 기업도 살아 움직이려면 사회적 자산을 나눠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영철학이 기업경영 문화에 녹아들어야 한다.

 열, 선택과 집중을 가로막는 무분별한 투자관행. 한 사람이 성인이 되고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전문성과 역할에 충실해야 하듯 기업도 주력사업에서 잘해야 성장할 수 있다. 지나친 욕심탓에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거나 시류에 편승해 돈 될만한 일에 모두 뛰어들다가는 잠재된 위협요인이 언젠가 목을 죄게 될 것이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족벌식 지배구조 타파가 한국기업 체질개혁 `핵심`■

정권 말기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느슨해진 틈을 타 재계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대기업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것이고 꼬집어 얘기하면 정부의 규제완화다.

 하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개혁과제는 재벌 그룹에 만연한 족벌식 지배구조. 재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오너 중심의 ‘전통적’인 지배구조가 결국 비효율·불투명이라는 폐해를 수없이 낳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연세대 박상용 교수가 64명의 외국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개선할 경우 주가를 현재보다 34% 더 지급할 용의가 있다고 답한 바 있다.

 최운열 서강대 교수는 “불과 몇 %의 지분으로 그룹 계열사 전체의 오너로 행세하며 이사진·최고경영자, 심지어 감사까지 쥐고 있는 전근대적 소유구조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상장법인 사외이사 의무화, 감사위원회 설치 의무화, 소수주주권 행사요건 완화, 결합재무제표 작성, 집단소송제 등 제도적 보완장치가 마련되면서 다소 나아지고 있지만 그룹사들의 전향적인 자세가 없이는 수십년된 관행을 근본적으로 고치기는 어렵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지난 2000년 발간된 랠프 워드의 ‘이사회 대변혁’이라는 책자를 통해 해답을 찾으려고 한 적이 있다. 그는 “미국 기업들도 전근대적인 지배구조를 혁파하는데 100년의 세월이 걸렸다”면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기업 지배구조만이 경쟁력의 초석”이라고 강조했다.

 김 행장은 기업 지배구조의 혁신을 위해 두 가지 변해야 할 점을 지적했다. 하나는 과거의 성공경험을 빨리 잊으라는 것이다. 수십년 전 구멍가게에서 출발한 대기업들이 과거의 경험에 연연할 경우 기업경영의 근본적인 틀을 벗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이라는 주문.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전통적인 지배구조는 신속한 의사결정과 경영성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명확한 책임소재라는 기준에 의해 재정립돼야 한다는 뜻이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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