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특집>새로운 20년-한국형 경영모델

 ■美·日 뛰어넘는 `창조적 모델` 찾자 ■

지난 89년 미국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의 재벌인 미쓰비시 부동산이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한다는 록펠러 센터 빌딩을 14억달러에 매입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국의 언론들은 일본의 제2의 진주만 공습이 시작됐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같은 해 일본의 가전재벌 소니는 50억달러를 투자,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했다. 이듬해인 90년에는 소니와 경쟁이라도 벌이듯 마쓰시타가 61억달러에 MCA를 인수, 미국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다. 80년대는 소위 연공서열의 종신고용, 장인정신,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투자, 창조적인 모방으로 대표되는 일본 기업의 성공시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면서 양상이 바뀌었다. 미래 장기비전보다는 현재의 수익성과 머니(주가·현금흐름)를 중시하는 주가 지상주의 경영, 제조기술보다는 핵심기술에 투자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인텔 등의 전면 등장, M&A 등 다양한 경영기법으로 무장한 GE, 스톡옵션으로 대변되는 성과주의 등의 경영기법 등이 미국 기업의 재도약을 이끌었다. 미국 기업들은 PC로 대변되는 90년대 정보기기 시대에서는 절대승자였고 일본기업들은 패자였다. 이러한 미국 기업들의 성과를 보여주듯 미쓰비시에 인수된 록펠러 센터는 96년 미국인에 의해 매입됐고 이에 앞서 95년에는 캐나다의 음료회사인 시그램진은 MCA를 인수했다. 물론 미쓰비시나 마쓰시타는 매입당시보다도 헐값에 판매해야 했다. 일본 기업들이 90년대 10년간 장기불황에 시달릴 때 미국 기업들은 호황을 구가했으며 미국 기업은 지난 80년대의 아픔을 보복이라도 하듯 일본 기업들에 기업경영의 불투명성과 종신고용체제를 고치라는 조롱섞인 충고를 던졌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승리이자 미국 기업의 승리시대였다.

 한국의 경영방식은 이러한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80년대에는 일본 따라잡기였다. 사실 그 당시 국내 기업들의 핵심 사업은 대부분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해 발전해가는 단계였으며 일본 기업들은 국내 기업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 모든 국내 대기업들이 일본의 혹독한 신입사원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 일체감과 조직 융화를 강조했다. 당장의 수익보다도 미래에 대한 투자를 더 중시했으며 하나의 지주회사가 여러 개의 기업을 지배하는 재벌화의 정점이었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가 ‘JIT(Just In Time)’라는 재고관리기법을 도입하자 모든 기업들이 앞다퉈 이를 적용했다. 일본식 경영방식은 국내 기업에는 하나의 바이블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이 넘어서면서 미국 기업의 경영방식을 답습하기 시작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던 일본 기업들의 몰락이 서서히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난 97년 IMF는 국내 기업 경영사의 한획을 그었다.

 IMF사태는 국내 기업에 사업구조조정, 경쟁력 강화, 투명경영, 글로벌 스탠더드의 도입 등 근본적인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했다. 국내 기업들은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인력감축, 사업축소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야 했으며 전사적자원관리(ERP)·공급망관리(ERP) 등의 경영기업을 도입했다. 또 글로벌 스탠더드의 영향으로 경제적 부가가치(EVA), 주주가치분석(SVA) 등으로 대표되는 주주 중심의 경영혁신 기법이 강조되고 스톡옵션이나 성과급 등의 성과주의 경영기법도 선보였다. 미국 경영기법이 정착할 무렵 미국에서는 엔론이라는 2위의 에너지 기업이 무너졌다. 투명성을 기치로 내세운 미국 기업이 불투명한 기업들이 쓰러지는 대표적인 사례인 분식회계로 무너진 것이다. 엔론을 시작으로 글로벌크로싱·아델피아·월드컴 등 대형 회사들이 회계부정에 연루됐다. 한때 시가총액에서 1위를 기록했던 시스코의 경우 고위 임원이 회사비밀을 이용, 납품사와 부정거래를 했으며 일부 CEO는 회사의 공금으로 호화생활을 하기도 했다.

 미국식 경영에도 틈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틈이 댐을 붕괴시킬지 아니면 곧 보수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그러나 미국식 경영에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주지시켜 줬다.

 이제 국내 기업들은 또 다른 본보기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마땅한 본보기가 보이지 않는다. 10년째 불황에 시달리는 일본 기업, 회계부정으로 얼룩진 일부 미국 기업 등은 더이상 벤치마킹 대상이 아니다. 이제는 미국식·일본식의 장점을 뛰어넘는 한국식 경영을 찾아야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

■재계 총수 어록 변천사 ■

삼성이나 LG 등 국내 굴지 대그룹은 계열사마다 CEO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 회사 전체를 움직이는 것은 소위 회장이라고 불리는 오너들이다. 따라서 총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룹 전 임직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하나의 행동지표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직접적으로 회사업무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회사의 경영 방향을 결정하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삼성그룹의 경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 회장의 말은 삼성 임직원뿐 아니라 타 그룹에서도 화제를 낳을 정도로 상당한 파급력을 보이고 있다.

 지난 93년에는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을 제시,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7·4제(7시 출근 4시 퇴근)를 도입하는 단초를 제공했으며 지난해에는 ‘네덜란드·핀란드·스웨덴 등 유럽의 강소국(작지만 강한 나라)를 연구해야 한다’고 말해 ‘강소국’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또 사상 최대 흑자가 예상되는 올해에는 ‘10년 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 삼성그룹 직원에게 끝없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지난 95년 회장에 취임한 이후 임직원들과 거리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로 고객과 인재양성 등에 대해서 말을 해왔던 그는 올해 시무식에서 ‘1등 LG’를 유난히 강조해 그동안 2위 자리에 만족한 듯한 LG임직원들의 타성을 질타했다. 그는 10분 남짓 걸린 새해 시무식 신년사에서 ‘1등’이란 단어를 무려 13차례나 사용했다.

 타 그룹과 달리 전문경영가 출신의 손길승 회장과 오너인 최태원 회장의 파트너십 경영을 선보이고 있는 SK그룹은 손길승 회장이 주로 대외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손길승 회장은 지난해 초 여성 신입사원 교육행사에서 ‘여성 CEO탄생을 기대한다’고 말해 여성 신입사원으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으며 올초에는 ‘모든 경영환경이 광속의 빠르기로 변하고 있어 발빠른 대응을 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광속론을 펴기도 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



■기고: 바람직한 경영모델은 -최병현 LG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

지난해 말 엔론 사태 이후 불거진 미국 유수 기업들의 회계 부정 사태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사필귀정이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꼬리를 물고 확대돼 나간 일련의 사건들은 주주가치 극대화에 반하는 모든 행위를 차단하는 엄격한 규정과 내외부 감시망으로 특징지어지는 미국 경영방식에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미국 경영방식을 추종하던 국가의 기업들은 똑같은 사태의 발생을 막기 위해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IMF 이후 미국 경영방식이 주도=80년대만 해도 우리는 일본식 경영방식에 익숙해 있었다. 자동차 산업의 경쟁우위 원천을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는 물론 멀리 미국에서까지 일본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미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살아나면서 효율성을 강조하는 미국 경영방식이 주목받게 됐다. 특히 97년도 말 IMF 사태 이후 미국 경영방식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경영방식은 뒷전으로 몰리게 됐다. 성과급, 연봉제, 직급파괴, 구조조정, 지배구조 개선 등 IMF 이전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경영방식들이 이제는 일반화된 한국 경영방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경영방식의 양면성 감안해야=미국 경영방식이 일련의 회계 부정 사태에 대해 예견된 사건으로 혹평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주주가치의 극대화를 지나치게 표방하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가 지닌 폐단이다. 경영자들은 주주가치의 극대화가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성과보다는 재임기간 동안 단기적인 성과를 높여야하는 압박을 받게 된다. 둘째,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따른 지배구조의 문제점이다. 전문 경영인이 다수의 주주를 대신해 기업을 경영하기 때문에 이른바 주인과 대리인간에 발생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경우 대리인을 감시할 수 있는 다양한 지배구조가 필요하게 되는데 지배구조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화를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셋째, 성과 중심의 단기적인 고용관계가 보편화돼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성과 중심의 단기적인 고용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노동시장이 유연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나친 성과주의는 기업에 대한 애사심이나 인간관계를 소홀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의 불씨로 작용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인수합병(M&A)시장의 발달을 또 다른 이유로 들 수 있다. 잘 나가던 기업이라도 경영실적의 악화로 주가가 하락할 경우 적대적 M&A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자들은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적정 주가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지금까지 일련의 회계 부정사건의 관점에서 미국 경영방식의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미국 경영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면들만 강조돼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이면에 있는 더 많은 긍정적인 면들이 부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영방식의 장점 가미해야=미국 경영방식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효율성보다는 애사심·협동심을 강조하는 온정주의·가족주의 경영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경영방식은 직원들에게 평생직장에 대한 애사심을 불러일으켜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바가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부패의 온상이라는 지적과 함께 장기고용에 따른 비효율성을 내포하기도 했다.

 최근 국내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경영방식의 주를 이루고 있는 구조조정과 능력위주의 인사관리를 실시한 이후 직원들의 애사심은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경영방식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한국 경영방식이 밀려나면서 생겨난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많은 국내 기업들이 제도정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마련하고 있다. 이는 미국 경영방식에 의해 가려진 한국 경영방식의 장점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글로벌 시대에 글로벌 스탠더드로 위치를 잡아가고 있는 미국 경영방식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선진 경영방식으로 배울 점은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런데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다른 데서 오는 부작용은 전통적인 한국 경영방식이 지닌 장점들을 끊임없이 찾아내어 융화시킴으로써 극복해 나가야 한다. 합리성과 효율성에 가족주의적 협동성, 애사심이 강조될 수 있는 우리의 경영방식은 없는 것인가 신중히 점검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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