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업체들이 잘 나간다. 상반기 실적발표는 마치 신기록 레이스 같다. 사상 최대 매출에 최고의 이익 소식이 넘쳐난다. 기간통신사업자는 물론 단말기업체도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한국통신, SK텔레콤이 저마다 큰 키를 뽐낸다. 심지어 당기순이익은커녕 영업이익도 내기 어려울 것 같던 업체들도 달라졌다. 데이콤이 완전 흑자기조로 돌아섰다. 하나로통신도 지긋지긋한 경영손실을 지난 상반기로 마감할 모양이다.
해외에선 IT거품이 꺼지면서 ‘통신업계=몰락’의 등식이 굳어져 가고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보다폰 왕국’도 돈이 없어 쩔쩔 맨다. 유럽 최강의 견실기업이라는 도이치텔레콤도 경영위기에 내몰렸다. CEO까지 갈아치웠지만 투자자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NTT도코모조차 해외투자 손실로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핀란드의 신화’ 노키아도 명성에 금이 갔다. 주가가 떨어지고 불량제품 문제로 골치를 썩였다. 모토로라 역시 회복세를 보이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국과는 전혀 딴 판이다.
왜 한국 통신업계만이 독주할까. ‘자수성가’한 단말기업계는 제쳐두자. 서비스사업자에게만 초점을 맞춰보자. 통신서비스업계는 돈이 없어 오히려 돈을 벌었다. 대단한 역설이다. 여기에 정부의 정책까지 한몫 했다. 최근 2∼3년간 메가 M&A 열풍의 주역은 은행과 통신업체였다. 거대 통신사업자들은 전지구적 네트워크서비스를 겨냥했다. 덩치 키우기가 지름길이었다. 중소업체를 마구 사들이고 지분을 투자했다. 미디어에 엔터테인먼트까지 문어발 확장이 칭송받았다. 결정타는 3세대 이통사업권을 따내려고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한 것이다.
우리 사업자들은 속만 태웠다. 트렌드에 동참하자니 자본이 없었다. IMF 직격탄으로 생존에 급급했다. 3세대 IMT2000에 거금을 동원했지만 해외 사업자에 비하면 새발에 피였다. 정부가 컨소시엄 구성을 유도한 덕이다. 출연금의 절반은 컨소시엄 참여업체들이 부담했다. 지난해부터는 마케팅 비용도 크게 줄었다. 정부가 단말기 보조금을 강력히 단속했기 때문이다. 뭉칫돈을 쓸 만한 대상이 아예 없어졌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잘 나갈 때 방만한 투자에 열올리던 거대기업은 성장은 고사하고 감원이 최대 이슈다. 3세대 투자로 경기를 되살리려 해도 감당할 돈이 없다. 반면 어려울 때 움츠렸던 한국 통신업계는 전화위복이 됐다. 돈이 넘쳐나지만 좀 더 많이 벌겠다고 3세대 투자를 미루고 있다. 심지어 확보한 실탄으로 신규 사업진출에 총력을 기울인다. 통신업체의 궁극적 지향점, 즉 뱅킹 사업을 위해 뛰고 있다.
이러니 벌써부터 통신요금 인하압력이 높다. 중소장비업계를 위해 3세대 투자를 확대하고 콘텐츠에 지원하라는 목소리도 크다. 물론 적자에 허덕일 때 요금 올리라는 주장은 없다. 사업자로서는 야속할 것이다. 그래도 이것이 현실이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산업은 모른 체하고 사업자 논리에 치중한 보조금 금지정책을 탄력 운용하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PDA나 곧 출시될 EVDV 혹은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내수에서 검증받아야 해외서도 성가를 기대할 수 있다. 언제까지 삼성·LG의 역량에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반드시 요금을 내리고 투자확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삼성전자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고가 고급전략으로 휴대폰 세계 1등상품 자리를 차지했다. 통신사업자들도 이제는 세계적 히트상품 하나쯤 선보여야 한다. 돈이 없나, 기술이 부족한가. 단말기나 콘텐츠를 집중 지원, 국가 IT경쟁력을 한차원 높이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지금은 정부와 통신업계가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다. 제로섬이 기본이겠지만 윈윈도 가능한 것이 시장이다.
<이택 정보가전부장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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