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현지 대학에서 동양학을 공부한 K씨는 99년 귀국, 모 증권사에 취직했다. K씨는 한국인이면서 능숙한 영어실력을 갖췄고 현지 동향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동양학을 전공해 동양의 사회문화, 경제적인 지식을 습득한 터라 모국에 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K씨는 기업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여만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우리나라 기업에 만연해 있는 학맥, 인맥의 벽을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K씨는 연세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사회적응교육(?)을 다시 받고 있다. 한국기업에 통용될 만한 학력을 완비해 증권사에 재취업하기 위해서다.
학맥, 인맥 중심의 인사구조는 우리나라 기업 전체에 만연돼 있다. 2년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참석차 다보스를 방문했던 SK 최태원 회장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당시 최 회장은 “한국의 기업조직은 서울대, 연·고대 등 학맥과 인맥, 지연 등으로 짜여져 있어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며 “기업이 변화하려는 노력없이 이대로 간다면 무너질 게 명백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는 또 “같은 직급이라도 능력에 따라 연봉이 10배나 차이나는 능력 위주의 인사를 실시해 이 같은 폐단을 없애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업의 경쟁력 저하로 표출되는 학맥, 인맥, 지연 등의 문제는 학력 중시의 인사정책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직원이 능력이 아닌 줄을 통해 회사에 들어오고 또 이 줄을 이용해 요직을 꿰차는 것이 문제다.
기업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명문대 출신자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수한 인력을 선발, 적재적소에 배치해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은 기업경쟁력과 직결되는 사항이다. 따라서 대학입학 단계에서부터 어느 정도의 검증과정을 거친 명문대 출신은 기업으로부터 선호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는 철저한 추가검증작업이 수반돼야 한다.
능력주의 국가라는 미국에도 ‘아이비리그’ ‘MBA(경영대학원) 톱10’ 등의 용어를 따로 만들어 가며 학교의 우열을 따진다. ‘아이비리그’는 하버드, 예일, 펜실베이니아, 프린스턴, 브라운, 콜롬비아, 코넬, 다트머스 등 미국 동부의 명문 8개 대학을 일컫는 말이다. 실제 하버드대 출신들은 평생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또 미국사회는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고 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매년 전세계 경영대학원의 서열을 매겨 발표한다. 지난해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세계 1위로 지목했다. 그 근거로 졸업생 취업률과 취업 후 연봉 및 승진면에서 세계 최고라는 점을 밝혔다. 대학에 순위가 매겨진다는 것은 어느 대학 출신이냐에 따라 대우가 확연히 구분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기업의 인사정책에는 선의의 학벌주의 외에도 학맥, 인맥, 지연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보이지 않는 배타적 성향의 유리벽을 형성, 스스로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기업들이 사조직 구성 자체를 엄격히 금하는 방법으로 유리벽을 깨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완전타파까지는 요원한 실정이다.
학맥, 인맥 중심의 인사구조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지연, 혈연, 학연 등 3연을 중시해온 우리 민족정서에 기인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기업의 허술한 인력관리에 있다.
국내 모 대기업의 L부장은 요즘 좌불안석이다. 입사 후 줄곧 자신을 끌어주던 상사가 올초 있었던 임원 승진인사에 탈락되면서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 상사는 같은 고향 출신인데다 같은 대학 ROTC 8년 선배로 사석에선 호형호제 해왔던 사이였다.
L부장은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확실한 줄을 잡아두는 건데”라며 후회하고 있다. L부장은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에 졸업한 후 이 회사에 들어와 한때 실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능력을 인정받아 몸값을 높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자기보다 튼튼한 줄을 잡아 2년 먼저 부장으로 승진한 입사동기를 부러워하는 처지가 됐다.
기업에 입사한 후 1, 2년이 지나면 3연을 따져 우호라인을 구축하고 반대로 임원이 되면 자신에게 힘을 실어 줄만한 우군을 마련하기 위해 후배를 대상으로 인맥을 구축하는 것이 우리 기업의 실상이다.
이는 기업들이 우수한 인재 선발에만 몰두했을 뿐 직원들의 지속적인 능력계발이나 능력에 맞는 처우방안 마련에는 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원이나 부서장을 해고하면 그를 따르던 직원들이 줄줄이 사표를 내던지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이 능력위주의 인사정책을 펼칠 목적으로 연봉제를 앞다퉈 도입하고 있지만 무늬만 능력본위 정책일 뿐 종합적인 처방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성과와 능력에 따라 연봉의 차이가 현격하게 벌어지고 상사와의 역전도 가능하게 하려면 과거부터 적용해오던 직급제도를 과감히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전통적인 직급체계는 우수인재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외국의 선진 우량기업이 적용해 오고 있는 직무성과주의 원칙의 인력운영기법을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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