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순 벤처기업협회장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20대 청년이었던 나는 여느 학생처럼 학업을 마치고 대학 교수나 대기업 연구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내 자본재 산업의 핵심역량이 해외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에 대한 도전정신과 젊음이 나를 흔들었다.
결국 기술독립만이 우리나라가 강해지는 근원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아무도 하지 못하고, 하려고 엄두도 내지 않은 일에 뛰어들어 국부(國富)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항로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시작한 게 CNC컨트롤러의 국산화였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창업을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결국 14년전 과학원 선후배들과 함께 친구가 써준 사업계획서 한장을 가지고 자본금 5000만원의 터보테크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14년이라는 시간동안 주위의 격려와 배려로 국산화라는 작은 일을 이뤄낼 수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악조건에서도 지난 4년 동안 1만1000여개가 넘는 젊은 벤처기업의 씨앗이 뿌려졌다. 뿌려진 씨앗이 발아해 열매를 맺기까지는 주위의 격려와 배려 그리고 무엇보다 기다림이라는 거름이 필요하다.
시골에서 볍씨를 담그는 일을 보면 필요한 양보다 배 이상을 담근다. 그리고 싹을 틔운 일정량의 볍씨는 모가 돼 이앙기에 의해 논으로 향한다. 논에 심겨진 모가 성장하다보면 병충해는 물론 필연적으로 피(잡초) 때문에 피해가 생긴다. 하지만 벼가 어릴 때 피를 제거하는 일은 쉽지 않다. 피를 뽑다가 오히려 멀쩡한 벼를 뽑거나 다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벼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농부에겐 현명한 기다림이 요구된다. 그러면 벼는 점차 자생력을 갖게 되고 피는 웃자라게 돼 구분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늦은 봄부터 가을 추수때까지 또다른 기다림이 필요해진다.
요즘 벤처업계에 발생한 사태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벤처라는 이름의 씨앗에 필연적으로 피가 있어서 말이다. 사이비 기업을 제거하면서 혹시나 튼실한 벼까지 뽑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서다.
이처럼 생태계라는 게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흑백논리나 성(聖)과 속(俗)의 논리로 풀 수 없는 묘한 특성 때문이다.
우리 젊은 청년들에게 개척자적인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유산를 심어주자. 젊은 청년들을 끌어안고 격려하며 기다리는 사랑이 필요하다. 일본의 어느 경제단체 원로로부터 “일본에는 기업할 젊은이가 없다”는 자조적인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게 현재 일본의 현실이다. 그래서 일본도 국운을 걸고 기업가정신 앙양에 나서고 있고 한·중·일 관계속에서 그 모티브를 찾아보려 애쓰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은 WTO 가입, 베이징올림픽 유치, 서부대개발 추진, 화교자본 유입 등 잇따른 성장계기를 만들며 미국·유럽연합(EU)과 함께 21세기를 이끌 세계 3대 경제축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향후 20년간 연평균 6∼8%대의 견실한 고도 성장도 기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아경제권은 상호협력 내지 경쟁을 해야하는 게 현실인데 지금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갖고 있는가. 특히 오는 6월 열리는 한일월드컵축구대회, 9월의 부산아시안게임 등을 미국테러사태로 인한 전쟁공포, 엔화약세, 무역마찰 등 악재를 극복하고 우리경제의 재도약을 이끌어낼 성장 모멘텀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 땅에 뿌려진 1만1000여 개의 벤처기업이 있다.
이젠 벤처들이 인고의 시간을 지나 결실을 맺도록 기다려 보자. 물론 조금이라도 긴장과 속도를 늦추면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이 될 수 있다. 또 청년실업이 30만이라는 얘기도 들려오는데 취업이 힘들면 눈을 돌려 새로운 시장을 보자. 그래도 높은 교육수준을 가진 인적자본이 이 나라의 경쟁력이 아닌가.
결코 바람은 우리를 위해 멈춰주지 않는다. 가을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는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리고 기다림이 필요하다. 희망은 벤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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