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변신을 거듭하는 성공하는 기업 HP.’
반세기를 이어온 정보기술(IT) 기업 HP를 떠올릴 때 곧잘 언급되는 이 문구만큼 HP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말도 드물다. HP는 위기 상황에서도 시장 환경이나 기술 변화 등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이른바 재창조(reinvention)를 통해 계측기·유닉스서버·프린터 등의 제품으로 다방면에서 시장을 주도했다는 의미다.
HP 기업의 역사는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다. 캘리포니아 시골의 어느 차고에서 단돈 538달러로 창업한 회사가 120여개국에 지사를 두고 480억달러 규모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기습적으로 해치우는 인수합병(M&A)의 솜씨는 더욱 그렇다. 물론 끊임없는 재창조의 정신을 통해서다.
HP가 창업정신으로 내세우는 재창조나 M&A라는 것도 결국 위기 극복의 전략으로 요약된다.
이 회사는 계측기 회사로 시작해 컴퓨터부문으로 발전했으며, 다음에는 유닉스가 향후 시장을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판단해 유닉스 시장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다른 기업보다 먼저 잉크젯 프린터나 레이저 프린터를 출시해 시장을 선점했다. 디지털카메라나 포토스캐너·포토프린터의 출시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컴팩의 합병 발표는 HP의 주도면밀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앞서 지난 95년에는 슈퍼컴퓨터업체인 컨벡스사를 인수했으며, 최근에는 e비즈니스가 부상하자 130억달러를 들여 전자상거래 전문업체인 베리폰을 합병했다. 현재 많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컴팩과의 합병 역시 닷컴 몰락 이후 위기 극복을 위한 HP의 고심에 찬 결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위기 극복을 위한 HP의 다음 선택은 무엇일까. 무선인터넷이 그 답이다. HP는 전세계 50억명의 인구 중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40억명을 네트워크 속으로 끌어들이면 ‘디지털 르네상스’가 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유선과 PC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HP가 무선인터넷을 유일한 대안으로 보는 것도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칼리 피오리나 회장도 “모든 인류가 인터넷의 혜택을 누리는 무선통신시대가 바로 ‘디지털 르네상스’며 여기에 HP의 희망이 있다”고 언급했다. 디지털 르네상스는 모든 정보기기가 인터넷에 접속돼 언제 어디서나 작동할 수 있는 ‘닷넷(.net)시대’를 의미한다. ‘기술을 위한 기술개발’이 아닌 ‘사람을 위한 기술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HP는 이른바 ‘쿨타운’이라는 신조어로 닷넷시대의 생활상을 예고했다. 쿨타운은 모든 사람·장소·사물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쉽게 접속되는, 말 그대로의 ‘멋진 세상’을 일컫는 말이다. 쿨타운이 완성되면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40억명의 인구도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와 인터넷의 모든 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HP는 PC·서버·프린터·팩스·카메라 등 모든 기기를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인간과 기기를 네트워크로 엮어 서비스하는 ‘e서비스’를 내세우며 새로운 기회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여기에는 기획에서 디자인·설치·관리 등 모든 부문에서 고객만족도를 높이겠다는 ‘TCE(Total Customer Experience) 전략’도 포함돼 있다.
HP의 위기 극복 전략은 조직운영에도 예외가 없다. 83개의 사업부를 12개로 통폐합했으며 로즈베리 인근의 2개 생산공장도 하나로 통합했다. 반세기 동안 이어오던 ‘해고없는 기업’이라는 ‘HP웨이’의 의미도 변화했다. HP는 지금 21세기 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 ‘HP웨이’까지 재창조하는 노력 속에 위기 극복에 나서고 있다.
<박승정기자 sjpark@etnews.co.kr>
◆인터뷰-HP 폴J.바이스코프 인터내셔널 PR담당이사
“HP로서는 IT경기가 부진의 늪에서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는 현재를 예상밖의 최대 위기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대내적으로는 명예퇴직제를 과감히 도입했으며 장기휴가제 실시, 출장 최소화 등을 통해 부대비용을 줄이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물론 투자 활동도 현상유지 수준에서 동결하기로 했습니다. 컴팩과의 합병 결정도 이 같은 위기돌파 전략 중 하나입니다.”
HP 기업전략기획 담당책임자인 폴 J 바이스코프 이사는 “지난 80년대 중반과 90년대 초에도 어려움이 있었으나 닷컴기업이 몰락하고 있는 현상황처럼 창사 이래의 위기는 없었다”며 “전사적인 위기극복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컴팩과의 합병은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추진하고 있으며 합병 과정에서 약간의 진통이 따르고는 있지만 순조롭게 마무리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HP의 브랜드에 대해 “오늘날 HP가 세계적으로 명실상부한 톱브랜드의 자리에 오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한 고품질 전략과 적정가격 유지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며 “HP는 오로지 고객들의 취향에 맞는 제품 개발과 고객을 최우선으로 하는 서비스 제공, 고객의 투자보호 등 다양한 전략과 기술개발 및 비전을 통해 톱브랜드의 가치를 높여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승정기자 sj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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